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초고속 파산 사태로 미국 국채 가격이 급등하면서 ‘채권 개미’들이 질렀던 환호성이 잦아들고 있다. 채권 가격이 기록적으로 급등했지만, 미국 정부와 연방준비제도가 조기 개입해 사태 확산을 막으면서 채권 가격이 다시 꺾였기 때문이다.
SVB 파산으로 연준이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늦추거나, 멈출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면서 지난 9일부터 13일 사이 3거래일간 2년 만기 미 국채 금리가 1%포인트 정도 폭락(채권 가격 상승)했다. 3거래일 낙폭으로는 ‘블랙먼데이’로 불리는 1987년 10월 19일 이후 사흘간 낙폭(1.17%포인트) 다음으로 컸다.
채권 금리 급락으로 채권 ETF 수익률이 뛰자, 관련 상품을 사뒀던 투자자들은 크게 반색했다. 디렉시온 데일리 20년 이상 미 국채 불 3배 ETF는 사흘 새 수익률이 10% 넘게 뛰었다. 회사원 최모(47)씨는 “요즘 동료들 사이에선 장기 채권 ETF 정도는 갖고 있어야 ‘투자 좀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들 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금융 당국이 사태 진화에 발 빠르게 나서면서 채권 금리가 도로 오르고 주가가 반등하는 등 상황이 안정되자 15일 해당 ETF 가격은 4.8% 급락 반전했다.
◇올 들어 국내 채권 7조 순매수 기록
올해 연준을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기준금리 인상을 멈추거나 인하에 나설 것으로 보고 채권 금리 하락(채권 가격 상승)에 베팅한 채권 개인 투자자들이 크게 늘어난 상태다. 지난해 국내 장외 채권시장에서 개인 투자자들이 순매수한 채권이 20조6000억원이 넘었고, 올 들어서도 이달 14일까지 7조원 넘는 순매수를 기록 중이다. 해외 채권 ETF(상장지수펀드)도 수천억원대를 보유하고 있다.
◇‘3배 레버리지’가 순매수 1위
15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최근 한 달 새 서학개미 순매수 1위 종목은 애플이나 테슬라가 아닌 ‘디렉시온 데일리 20년 이상 미 국채 불 3배 SHS(TMF)’라는 ETF로 1억1107만달러(약 1450억원) 순매수를 기록했다. 이 종목은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잔존 만기 20년 이상 채권 가격 하루 변동 폭의 3배를 추종하는 상품이다. 채권 가격이 1만큼 오르면 상품 가격은 3이 오르게 설계됐다.
연내 채권 금리 하락에 확신을 가진 개인 투자자 중에는 확실한 수익률을 기대하면서 3배 레버리지 종목을 선호하는 경향도 눈에 띈다. 작년 말 메리츠증권이 상장한 ‘3배 레버리지 국채 30년’ ETN(상장지수증권) 상품의 경우 57일 만에 300억원 넘는 투자가 몰렸다. 같은 회사가 출시한 국채 30년 일반 ETN 상품 대비 시가총액이 4배다. 증권사가 자기 신용을 바탕으로 발행하는 ETN은 자산운용사가 만드는 ETF의 사촌 격이다.
조민암 메리츠증권 ETP트레이딩 팀장은 “채권의 경우 만기가 길더라도 주식이나 원자재 등 여타 자산군에 비해 가격 변동성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인데, 레버리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국채 투자를 통해서도 기대 수익을 높이려는 투자자들이 올해 3배 레버리지 종목을 많이 사고 있다”고 분석했다.
◇극심한 채권 금리 변동성 주의해야
은행 파산이라는 예기치 못한 변수 출현으로 금리 동결이나 인하 기대가 더 커지긴 했지만, 여전히 시장이 불안한 모습이라 채권 가격 변동 폭이 커질 수 있어 투자에 주의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최근 벌어진 채권 금리 급등락에서 보듯 개인들이 채권 방향성을 맞히기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주의도 요구된다.
SVB 역시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국채 금리가 낮아지자 채권에 대규모로 투자했지만, 지난해 기준금리가 급등하면서 큰 손실을 냈다. 채권 금리 방향을 거꾸로 예상한 것이 파산의 원인이 된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레버리지 상품은 단기적으로 투자 대상의 가격 상승에 대해 확신이 있을 때 활용하면 좋은데, 투자 기간이 길어져 수익과 손실이 반복해서 나타날 경우 수익률에 부정적인 복리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장기채권 수익률은 거시경제 상황에, 단기채권 수익률은 당장의 금리정책에 영향을 받는데 장기채권 상품에 레버리지를 씌워 단기간에 승부를 보려는 것이 상품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