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현지 시각) 뉴욕에서 열린 미국 공연계 최고 권위의 토니상 시상식에서 K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함께 쓴 윌 애런슨(왼쪽)과 박천휴 작가가 극본상을 받은 뒤 활짝 웃고 있다. 두 사람은 공동 프로듀서로서 작품상을 받은 것을 비롯, 음악상(작사 및 작곡)까지 이날 토니상 트로피 3개를 차례로 받았다. /로이터 연합뉴스

“한국(국적)인 작가가 쓰고,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공연이 브로드웨이 유명 제작자, 연출, 배우와 이 규모의 오픈런(무기한) 공연을 하는 건 처음 아닐까요. ‘한국인 최초’를 강조하는 사람들 보며 촌스럽다 흉봤는데, 이렇게 스스로 얘기하는 걸 보면, 저… 실은 꽤나 고생스러웠나 봐요.”

한국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미국 버전 ‘Maybe Happy Ending’의 브로드웨이 개막이 확정된 지난해 5월 15일 박천휴(42) 작가는 소셜미디어에 이런 글을 남겼다. 유학생으로 작가로 오래 살았던 뉴욕, 치열했던 회사 생활, 사랑과 이별, 브루클린의 작은 방…. 그는 “늘 마음 한편은 이방인 같았고 또 외로웠지만, 돌이켜 보면 어리고 서툴렀던 그 시간이 ‘어쩌면 해피엔딩’의 소중한 정서가 됐다”며 “무엇보다 윌이라는 세상 가장 훌륭한 창작 동업자를 만난 행운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6관왕이 된 8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박천휴와 윌 애런슨(44)은 개인적으로도 최고상인 작품상을 포함해 음악상과 극본상까지 트로피 3개씩을 집으로 가져가게 됐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뉴욕 브로드웨이 대극장으로, 마침내 미 공연계 최고 영예까지. ‘어쩌면 해피엔딩’은 윌·휴 콤비가 일군 ‘K뮤지컬의 기적’이다.

◇‘K뮤지컬의 기적’ 일군 뉴욕대 인연

1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드라마데스크상 시상식에서 6관왕이 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음악과 이야기를 함께 만든 윌 애런슨(위)과 박천휴 작가. /뉴욕=이태훈 기자

큰 바람을 일으킨 시작은 나비의 날갯짓 같은 작은 인연이었다. 박천휴 작가는 뉴욕대 학부 미술 전공(studio art)의 문을 두드리던 2008년 무렵 뉴욕대 대학원에서 뮤지컬을 전공하던 윌 애런슨 작곡가를 처음 만났다. 애런슨은 하버드대 학부에서 음악을 전공한 뒤 독일 베를린예술대에서 1년간 오페라를 공부하고 뉴욕대에 와 있었다. 지난해 말 뉴욕에서 박씨와 함께 만난 애런슨씨는 “처음엔 학부에서 드라마를 전공하고 의학대학원에 진학해 의사가 된 형처럼 뇌의학을 공부하는 의사가 될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독일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오페라 공부할 기회가 온 거예요. 하지만 오페라는 공연 형식도 관객 폭도 한정돼 있었어요. 난 뭘 하고 싶지? 오페라 같은 ‘스위니 토드’부터 팝 요소가 강한 ‘헤어 스프레이’까지, 자유롭게 다 할 수 있는 건 뮤지컬이었어요.”

토니상 6관왕 K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남녀 주연 배우 대런 크리스(왼쪽·남우주연상 수상)와 헬렌 J 셴. 함께 든‘화분’은 한국 발음 그대로 등장하는 이 공연의 깜짝 스타다. /사진가 매슈 머피, 에번 짐머먼

한국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박천휴는 가수 ‘에반’(‘클릭B’ 멤버 유호석)의 노래 ‘울어도 괜찮아’, 가수 박상민이 부른 드라마 ‘키드갱’의 주제곡 ‘거친 인생’ 등의 가사를 쓴 작사가. 당시 뉴욕대 대학원의 한국 학생들이 둘을 연결해줬다. 그는 “미란다 줄라이의 영화와 책을 좋아하는데, 처음 만난 날 윌이 자기도 좋아한다며 그 책을 가방에서 꺼내더라”며 웃었다. “벤 폴즈의 음악과 히치콕의 영화까지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참 비슷해서 금세 친해졌어요. 처음엔 아무 목표 없이 윌이 곡을 쓰면 제가 가사를 붙여 다섯 곡 정도를 녹음하기도 했어요.”

◇애런슨 먼저 K뮤지컬로… 콤비 탄생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공연하는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44번가 벨라스코 극장 앞에 선 윌 에런슨(왼쪽)과 박천휴. 두 사람이 함께 글을 쓰고 에런슨이 작곡한 '어쩌면 해피엔딩'이 올해 미국 공연계 최고 권위의 토니상 10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태훈 기자

비슷한 시기 뉴욕대 대학원생이던 한국 작가의 소개를 통해 애런슨이 먼저 한국 뮤지컬 ‘달콤, 살벌한 그녀’의 작곡을 맡게 됐다. 애런슨은 “그땐 한국에 대해 너무 몰랐다”고 했다. “세종대왕님께 정말 감사드려요. 한글은 읽고 쓰는 걸 배우는 게 쉬웠고, 처음 뮤지컬 작곡의 기회를 준 한국에 대해 더 공부할 수 있었어요.” 애런슨의 첫 뮤지컬 프로듀서가 두 사람이 녹음한 습작곡을 듣고 영화 원작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작사·작곡을 제안했다. ‘윌·휴 콤비’가 뮤지컬 작업으로 처음 호흡을 맞췄다.

2014년 우란문화재단의 첫 개발 지원작으로 선정된 ‘어쩌면 해피엔딩’이 대학로 소극장과 일본, 미국 뉴욕, 애틀랜타를 거쳐 코로나 팬데믹 위기를 뚫고 투자를 유치해 브로드웨이에 데뷔하기까지,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이제 K뮤지컬의 전설이 되어 가고 있다.

◇“정말 많이 싸워요. 그게 창작의 힘”

보통 가사와 대본이 음악보다 먼저 나오는 일반적 뮤지컬과 달리, 가요 작사 경험이 있는 박천휴는 애런슨이 먼저 쓴 곡에 가사를 붙이는 게 편했다. 둘은 섬세한 디테일에 집중하는 태도, 자료 조사를 통해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고 영어로 먼저 대본을 쓰는 부지런함까지 잘 맞았다. 지난해 차범석희곡상 뮤지컬 대본 부문 수상작 ‘일 테노레’도 그렇게 함께 썼다. “윌은 마음의 코어가 단단해 흔들림이 없어요. 본받고 싶어요.” 박천휴의 말에 애런슨이 손을 내저었다. “제 무기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하는 것뿐이에요. 휴(박천휴)는 취향이 정말 좋고 통찰과 판단이 뛰어나요.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이렇게 사이 좋은 두 사람, 싸우지는 않을까. “엄청 많이 싸워요!”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대답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싸움은 작업 과정의 일부예요. 뮤지컬은 긴 마라톤이고, 서로를 믿고 예술적 가치관과 철학을 존중하니 결국 답을 찾아내죠.” 토니상 이후, 이제 두 사람이 찾아낼 새로운 답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세계의 뮤지컬 팬들이 함께 기다리게 됐다.

☞윌·휴 콤비

토니상 6관왕 K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쓴 윌 애런슨(44)과 박천휴(42) 작가를 우리 뮤지컬 팬들이 애정을 담아 함께 부르는 별명. 두 사람은 뉴욕대 수학 중이던 2008년 처음 만난 뒤 함께 극본을 쓰고 애런슨이 작곡하는 방식의 뮤지컬 창작 작업을 이어왔다. 지난해 차범석희곡상 뮤지컬 대본 부문 수상작인 ‘일 테노레’를 비롯해 ‘번지점프를 하다’, ‘고스트 베이커리’ 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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