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우리나라 상품과 서비스 수지는 30억3000만달러(약 4조원) 적자를 냈다. 상품 수지가 대규모 적자인 데다 해외여행 등으로 외국으로 빠져나간 외화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체 경상수지는 2억7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외국에서 배당과 이자 소득으로 벌어들인 돈이 37억8000만달러나 됐기 때문이다.
이런 경상수지 대차대조표는 우리나라가 해외에 물건만 팔아서 돈을 버는 나라가 아니라 해외에 투자해 놓은 자산으로 먹고사는 나라로 변모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의 무역수지는 글로벌 경제 환경에 따라 흑자와 적자가 오락가락하지만, 세계 최대인 400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대외 순자산 덕분에 경상수지는 늘 큰 폭 흑자를 낸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대외 순자산이 5010억달러(약 600조원)로 사상 처음 국내총생산(GDP)의 30%를 넘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은 해외 자산 가운데 45%가 주식이나 채권으로, 자산 다양화가 이뤄지고 있다”며 “경상수지 누적 흑자와 금융기관의 해외 투자 수익 추구 등이 대외 순자산 증가의 배경”이라고 했다.
IMF 설명대로, 한국 금융회사들은 국경 밖에서 빠르게 영역을 확장하며 자산을 불려가고 있다. 그 결과 4대 금융그룹(KB·신한·우리·하나)이 해외에서 거둔 순익은 2018년 8820억원에서 지난해 2조1516억원으로 두 배 넘게 늘었다. 그래도 한국 금융회사들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 이익의 30%, 많게는 40%를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그날까지 ‘전진, 앞으로!’를 외치고 있다.
◇성과로 나타난 해외 진출
한국 금융회사들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된 건 2010년대 이후부터다. 전통적인 내수 산업으로 분류되던 금융 산업은 1990년대 이후 해외 진출을 모색했지만, 외환 위기와 카드 사태 등을 겪으며 몸을 추스리느라 오히려 해외 점포 수를 크게 줄였다. 2006년 국내 은행의 총수익 중 해외 비율은 3%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내 경제성장 속도가 줄고 내수 시장에서 금융회사 간 경쟁이 격화되자 다시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초기엔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지만, 차츰 노하우가 쌓이며 성공 사례가 늘고 있다. 베트남에서 사무소로 시작한 신한베트남은행은 인수 합병과 디지털 전략 등에 힘입어 베트남 내 외국계 은행 1위로 자리 잡았고, 우리은행이 2014년 인도네시아 소다라은행을 합병해 만든 우리소다라은행은 지난해 사상 최대인 684억원 순이익을 거뒀다. KB금융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메콩 3국(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에서 거점을 마련했고, 하나금융도 인도네시아에서 디지털 은행 ‘라인뱅크’로 돌풍을 일으켰다.
그 결과 한국 금융사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이익은 빠르게 늘고 있다. KB·신한·우리·하나 등 4대 금융그룹의 글로벌 순이익이 5년 새 두 배 넘게 늘었고, IBK기업은행도 역대 최대 이익을 올린 중국 법인을 비롯해 지난해 글로벌 사업 부문에서 1261억원 이익을 내며 처음으로 1000억원을 돌파했다.
주요 금융 그룹 전체 이익에서 해외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도 하나금융 19.5%, 우리금융 14.3%, 신한금융 12.2%, KB금융 11% 등으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해외 자산도 크게 불어나는 중이다. KB금융의 글로벌 자산은 2018년 8조5480억원에서 지난해 42조9830억원으로 급증했고, 같은 기간 우리금융도 25조7190억원에서 44조1440억원으로 늘었다. 신한금융도 2018년 31조6560억원에서 지난해 55조1740억원으로 자산을 불렸다.
하지만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세계시장 말고는 답이 없다고 보고 목표를 더 올려 잡는 중이다. 국내에 비해 아직 해외 비율이 낮은 편인 KB금융은 글로벌 이익 비율을 2030년 30%, 2040년 40%까지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윤종규 KB금융 회장은 올해 신년 인사회에서도 “글로벌 사업 정상화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이고, 이미 진출한 거점에서 부진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도록 신규 투자를 단행하겠다”며 해외 사업에 의지를 드러냈다.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도 2030년까지 글로벌 수익 비율 3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고,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은 중장기적으로 글로벌 이익 비율을 중장기적으로 40%까지 올리겠다고 했다. 다른 금융 그룹에 비해 해외 진출이 늦었던 농협금융도 글로벌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30년까지 11국에 27네트워크를 구축해 글로벌 이익 비율을 10%까지 키운다는 목표다.
◇동남아 넘어 선진국으로
그동안 한국 금융회사들은 주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국가 위주로 해외 사업을 확장하는 전략을 펴왔다. 하지만 여러 해에 걸친 경험으로 자신감과 노하우가 쌓이면서 이제 미국과 유럽 같은 금융 선진국으로 눈길을 돌리는 금융사가 늘고 있다. 2019년 인도네시아에 현지 법인을 세운 IBK기업은행은 최근 폴란드에 사무소를 열었고, 국민은행은 지난해 1월 싱가포르 지점을 개설했다. 삼성생명도 지난해와 올해 영국의 부동산 전문 자산 운용사와 프랑스의 인프라 전문 운용사 지분을 잇따라 사들여 화제를 모았다.
자산 운용사 중 해외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미래에셋자산운용도 글로벌 비즈니스에 더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8년 미국 ETF 운용사 글로벌엑스(Global X)를 인수해 운용 자산(AUM)을 4년 만에 5배 넘게 키운 미래에셋은 글로벌엑스를 간판으로 내세워 호주, 일본, 브라질 등으로 본격적으로 영역을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한국투자증권도 지난 1월 미국 금융사와 함께 ‘SF크레디트파트너스’를 설립해 금융 당국 라이선스를 확보하는 한편, 뉴욕 현지 법인이 대형 인수합병(M&A) 건과 빌딩 거래에 인수 금융 딜을 주관하는 등 미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이다. 또 신한투자증권은 혁신의 요람에서 새로운 투자 기회를 발굴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국내 증권사 중 처음으로 실리콘밸리에 사무실을 열었다.
KB금융과 하나금융이 ‘투 트랙’ 전략을 들고나온 것도 신흥국 못지않게 선진국 시장 진출에 힘을 싣기 위해서다. KB금융은 국민은행 런던 지점을 홍콩·뉴욕지점과 함께 CIB(기업투자금융) 허브로 육성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APAC(아시아·태평양) 권역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지난해 싱가포르 지점도 개설했다. 하나금융도 선진 시장에서 IB와 기업 금융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뉴욕·런던·싱가포르·시드니 4개 네크워크에 IB 데스크를 설치하고 런던·싱가포르에서는 자금 데스크를 운영하고 있다. 하나금융 관계자는 “향후 각 데스크에 전문 인력을 더 확충하고 심사역 현지 파견을 확대하는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원을 늘릴 예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