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의 한신 고시엔 구장은 고교 야구 선수들에겐 꼭 밟아보고 싶은 ‘꿈의 무대’다.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이른바 ‘여름 고시엔’이 펼쳐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전국 4000여 고교가 치열한 경쟁을 펼친 끝에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광역자치단체) 대회를 통과한 49팀(도쿄·홋카이도는 2팀이 진출)만 매년 8월 고시엔 구장에 설 수 있다. 우승 경쟁에서 탈락한 선수들이 눈물을 흘리며 구장 흙을 퍼담는 의식은 고시엔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지난 2021년엔 재일 한국계 학교 교토(京都) 국제고가 4강에 올라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오는 11월, 이 고시엔 구장에서 특별한 대회가 열린다. 주인공은 고교생이 아닌 OB(old boy·졸업생)들이다. 2020년 ‘여름 고시엔’을 앞두고 구슬땀을 흘리다가 코로나 사태로 대회가 취소되면서 그 무대를 밟지 못하게 된 이들이 ‘잃어버린 여름’을 되찾고자 그들만의 고시엔을 열기로 한 것이다.
일본 도쿄 조사이고교 야구부원이었던 오타케 유토씨가 이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7세 때 야구를 시작해 고시엔 출전을 목표로 달려왔던 그에게 코로나로 고시엔이 열리지 않는다는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다고 한다. 오타케씨의 아버지도 과거 고시엔 출전을 목표로 했지만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뤄주고 싶다는 생각에 어릴 때부터 휴일마다 캐치볼 훈련을 했고, 고등학교도 ‘스포츠 추천’ 전형으로 진학했다.
그랬던 오타케씨가 대회 취소 소식을 접한 건, 고시엔 출전의 마지막 기회였던 3학년 시절인 2020년 5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전력을 다해 고시엔 출전 고교 선발 대회를 준비하던 그는 순식간에 꿈을 잃었다. 오타케씨는 포브스재팬 인터뷰에서 “목표가 사라지면서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 같은 무기력한 나날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1924년 개장한 고시엔 구장에서 고교 야구 대회가 취소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이던 1941~1945년 이후 처음이었다.
오타케씨는 이후 아버지처럼 자영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2021년 무사시노 대학 ‘기업가 정신 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에 가서도 진로 고민은 이어졌고, 헛헛한 마음에 고교 시절 야구부원 동료들을 만날 때면 그들은 늘 고시엔 얘기로 꽃을 피웠다. 동료 중엔 ‘제2의 인생’을 택한 이도 있는 한편, 아쉬움에 야구를 놓지 않은 친구도 많았다. 그는 “도저히 고시엔이 잊히지 않았다”며 “우리의 여름을 되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오타케씨는 지난해 8월 ‘그 여름을 되찾자’는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자신처럼 허무하게 고시엔 출전 꿈이 물거품 된 이들을 모아 뒤늦게라도 대회를 열어보자는 것이었다. 고시엔에서 좌절한 고학년 부원들은 보통 ‘여름이 끝났다’고 표현하는데, 이를 ‘여름을 되찾자’로 바꾼 것이다.
프로젝트 소식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확산했다. 고교 야구 최고 무대인 고시엔 대회가 취소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던 만큼, 학생들의 허탈함에 공감한 사람들이 프로젝트 게시물을 적극적으로 퍼나른 것이다.
그 결과, 시작 2개월 만에 당시 고시엔 티켓을 따낸 학교 49곳 중 46팀에서 “출전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선수단 재구성이 여의치 않았던 효고·후쿠오카·구마모토 등 일부 지역은 3~4곳이 힘을 모아 ‘합동 OB팀’을 구성하고 나섰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들은 지난 9일 드디어 ‘야구의 성지’인 한신 고시엔 구장 예약에 성공했다. 다만 경기장 스케줄에 따라 구장을 이용할 수 있는 날은 11월 29일 단 하루뿐. 한정된 시간에 어떻게 결승전까지 치를 것이냐에 대해선 논의 중이다.
이들은 “기업 힘을 빌리지 않고 진행하자”는 목표대로 오는 6월 크라우드펀딩(인터넷 소액 모금)을 통해 구장 이용료 및 선수들의 교통비 등을 충당할 계획이다. 수익이 발생하더라도 “고교 야구에 환원하겠다”고 뜻을 모았다. 오타케씨는 “좌절하더라도 열정만 있다면 꿈은 언젠가 다시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