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암 분야 저명 학술지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렸다. 커피의 카페인 성분이 뇌암 세포의 전이를 억제한다는 것이다. 해당 논문의 1저자는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를 다니던 한경석 박사였다. 한 박사는 이후 MIT와 하버드를 거쳐 3년 전 한국으로 돌아와 화학물질의 일종인 시냅스를 통해서만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뇌의 신경세포들이 시냅스뿐 아니라 전기적 작용을 통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충남대 교수로 임용된 한 박사는 “UST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곧바로 실험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연구 환경이 갖춰진 곳”이라면서 “외국 연구자도 많아서 이들에게 배운 국제 경험 등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UST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면서 대학 강단에 오르는 졸업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UST는 지금까지 석·박사생을 3465명 내놨다. 매년 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만큼 한국에서 한 해 동안 배출되는 이공계 석·박사생 2만6000여 명 중 1%가 매년 UST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졸업생들이 대학과 출연연, 산업계 등으로 진출하면서 이공계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되고 있다. UST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내년 3월부터 ‘국가연구소대학교(UST)’로 교명을 바꾼다.
◇교단에 선 UST 졸업생들
UST는 일반 대학원과 다르게 전공 수강이나 연구 등을 30개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서 진행한다. 출연연 연구자들은 UST ‘교수’가 돼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생들은 국가 연구 현장에서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국책 연구 과제를 수행할 기회를 얻게 된다. 지난해 UST-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졸업하고 곧바로 임용된 이가경 세종대 교수는 “고해상도 질량 분석기는 한 대에 7억~8억원 정도 하는데 연구소가 이러한 고가 장비들을 갖추고 있어서 연구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라고 했다.
현장 중심 교육은 교단에 올라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2016년 UST-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졸업한 이아현 순천향대 교수는 “산업 현장에서 실제로 활용될 수 있는 실용적인 기술을 위주로 연구하는 학풍이 있어서 산학 협력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이 때문에 일반 대학의 교수가 돼 이론 교육을 하면서도 ‘이 이론은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된다’라거나 ‘기업에서는 이렇게 활용하더라’라는 등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연구 현장에서 다양한 연구자를 만나는 만큼 융합 연구도 수월하다. 2015년 UST-한국생명공학연구원(KRIBB)을 졸업한 나운성 전남대 교수는 “바이러스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생물과 화학, 기계 등 다양한 학문이 연결돼야 하는데, 주변에 기계연구원과 화학연구원 등이 있어서 융합을 통해 백신 개발이나 진단 기기 개발을 할 좋은 기회가 됐다”고 했다. 또 “일반 대학원에서는 일정한 주제가 주어진 연구실이 대부분인데 UST에서는 해외에서 포닥(박사 후 연구원)을 하고 들어온 젊은 연구자가 많다 보니 최신 연구 주제에 대해 알 수 있고 다양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했다.
◇출연연·산업계 진출도 증가
출연연으로 진출하는 졸업생도 늘어나고 있다. 2022년 후기 기준으로 내국인 졸업생 2267명 중 약 220명이 출연연 정규직으로 취업했다. 갈수록 출연연 주요 보직자도 늘어나고 있다. 고은진 국방과학연구소 탐색기기술부 팀장은 “일반 대학원에서는 배우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교수나 랩실 선배겠지만, UST에서는 각 분야 박사 연구원이 있어서 이들에게 질문하고 답을 얻는 과정이 일반 대학원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했다.
UST를 통해 산업계로 진출한 경우는 KRIBB 창업 기업 ‘진코어’가 대표적이다. 김용삼 진코어 대표는 2013년부터 지금까지 UST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UST에서 김 대표의 지도를 받으며 유전자 가위 기술 개발에 참여한 김도연 박사는 현재 진코어 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김 대표는 “대학원 과정은 코스워크(수업)도 중요하지만 수준 높은 연구 경험이 더욱 중요하며 이는 연구비와 연구 환경이 좌우한다”면서 “이런 면에서 UST는 국내 최고 수준 연구 환경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UST(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한 전문 연구 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2003년 설립 인가 받은 국가연구소대학원.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연구자들이 교수가 돼 학생들에게 연구 현장 중심의 교육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