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평생 학교 울타리 안에서 살았는데, 대리운전대를 잡고 인생을 더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늘 학생들에게 인사받던 제가 이제는 사람을 만나면 저절로 고개가 꾸벅 숙여지며 ‘사장님’ 소리가 나옵니다.”
성공회대 교수 출신 김은규(66) 신부가 대리운전 2년 경험을 담은 ‘대리운전 취중 진담’(밥북)을 펴냈다. 연세대 신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성공회대에서 30년간 구약학을 가르친 김 신부는 2022년 만 63세에 조기 은퇴한 후 강원도 한 작은 도시로 내려가 그해 10월부터 작년 말까지 2년여 운전대를 잡았다. 교수 시절 모았던 책을 무게로 달아서 넘기면서 ‘인생 1막’을 정리한 그는 ‘똑같은 틀에 갇혀 남은 삶을 보내지 말자’고 결심하고 ‘교수도 신부도 아닌 김 대리’로 오후 5~6시부터 새벽 1~2시까지 하루 7~8시간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버는 돈은 때로는 최저 임금 시급에 못 미치기도 했지만 교수 생활과는 또 다른 보람을 안겨줬다.
책에는 그가 대리 운전을 시작한 가을부터 겨울, 봄, 여름 계절순으로 목적지까지 평균 15~20분 정도 ‘김 대리’와 ‘고객’이 나눈 말이 정리됐다. ‘김 대리’는 주로 그들의 하소연을 경청한다. 고객은 남녀노소, 빈부 구분 없이 다양하다. 승용차 고객이 많을 것 같지만 뜻밖에 1톤 트럭을 모는 택배 기사, 일용직 건설 노동자 고객도 많았다. 고객들의 짧은 이야기에는 삶의 깊이가 우러난다.
잊을 수 없는 경험도 많다. 한번은 자정 무렵 한 가족이 서울의 대학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대리 기사 사이에선 ‘홀인원’으로 통하는 심야 장거리 운전이었다. 그렇지만 가족의 분위기가 이상스레 조용했다. 묵묵히 운전하던 중 아이가 잠깐 모자를 벗은 모습을 봤는데, 머리카락이 없었다. 가족을 대학 병원 응급실에 내려주고 24시간 찜질방을 찾는 ‘김 대리’는 구체적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아이의 건강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한 고객이 말한 “인생에서 늘 10원 밑지게 살라”는 격언(?), “난 맨날 하나님께 기도해. 자다가 한 방에 데려가 달라고” 하는 80대 노인들의 유머도 고된 대리운전의 활력소. 마다해도 굳이 팁을 주는 사람이 있고, ‘팁은 없다!’고 미리 선언하는 고객도 있다. 경기 침체와 자영업의 어려움, 저출생 고령화 문제, 텅 비어가는 농촌 문제까지 대화 주제는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를 망라한다. 개인택시 기사의 차를 대신 몰아준 경우도 있다.
동료 대리 기사들의 애환도 놓치지 않는다. 가게 임차료를 보태기 위해 운전대를 잡는 투잡족부터 한국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애쓰는 탈북민까지 다양하다. 한여름에 동상(凍傷)에 걸릴 줄은 몰랐다. 운전대 양옆으로 나오는 에어컨 바람을 매일 7~8시간씩 쐬니 손과 팔엔 약한 동상이 걸리는데 찬바람이 덜 닿는 다리는 모기에게 뜯긴다. 운전대를 잡기 전까진 단어조차 들어본 적 없던 ‘진상’ 손님도 더러 만났다며 “대리 기사들에 대한 인간적·인격적 대우와 존중,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리운전 2년의 교훈은 ‘싸가지’라는 단어로 정리된다. 다시 말해 ‘인성’ 혹은 ‘인간의 도리’이다. 인성을 갖춘 고객을 만났을 때는 나이·직업과 관계없이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는 “대리운전을 하면서 종교 경전의 지혜 못지않게 삶에서 우러나는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며 “젊었을 때 경험했더라면 설교 때 예화를 찾느라 여러 책을 뒤지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