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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슬 머금은 촉촉한 어조로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로 이어지는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양희은은 도무지가 끌고 온 노래라고 했다. ‘도무지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다’라고 백지에 써놓았더니, 슬금슬금 그다음 가사들이 머리를 디밀며 따라오더라고.

인터뷰 작가로 살면서 흥분되는 순간은 그 사람이 쓰는 독특하고 싱싱한 입말을 만날 때다. ‘그러라 그래’에 이어 ‘그럴 수 있어’라는 책을 낸 가수 양희은의 입에서 ‘도무지, 문득, 툭툭’ 같은 투박한 말들을 들을 때가 그랬다. 어금니를 악물고 ‘반드시, 기필코, 당연히’를 발음하던 청년과 중년의 시절이 지나면, 습관적으로 내뱉는 나만의 생존어가 고개를 든다. 칠십대의 현역 가수는 생의 불가사의에 토 달지 않는 평안함, 그럼에도 시무룩한 젊은 기세가 느껴지는 말투로 ‘도무지, 문득, 툭툭’ 같은 말들을 발랄하게 내뱉었다.

도무지의 효능은 항상 데리고 다니는 동무인 ‘모르겠다’에 있는 것 같았다. 신간 ’결심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책에서 경제학자 러셀 로버츠는 괜찮은 선택을 위해서는 ‘모른다’는 투항의 자세가 매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선택의 효용에 평생을 매달려온 경제학자가 우리에게 ‘완벽한 내일’은 없고 오직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만 있을 뿐이니, ‘답 없는 인생 문제’에 꼭 맞는 정답을 찾으려 힘쓰지 말고 그저 훌쩍 ‘뛰어들라’고 권한다. 인생은 해결해야 할 문제덩어리가 아니라 맛보고 음미해야 할 아름다운 미스터리라고 주장하며.

‘뛰어듦’이라는 말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경험상 ‘뛰어듦’의 세상에는 예측 가능한 실패와 예측 너머의 놀라움이 있었다. 놀라움은 단지 실패하지 않음이 아니라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다름의 광대함이다. 영화 ‘엘리멘탈’에서 극과 극의 성분이었던 불(엠버)과 물(웨이드)이 두려움을 이기고 서로에게 뛰어들었을 때, 무지개의 신세계로 나아갔던 것처럼.

효용의 최전선에 있는 경제학자가 ‘뛰어드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라고 결론 내린 근거는 단순하다. 잘못은 하루 빨리 수정하면 되고, 설사 그리되지 않더라도 생의 불가사의를 통과하고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성숙의 새 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인생은 최고 선택들의 합이 아니다. 의사이자 경제학자로 미국의 코넬 대학교 교수를 지낸 김현철이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책에서 무수한 사회 실험과 데이터로 증명하고 있는 것도 ‘인생 성취의 8할은 운’이라는 사실이었다. 넓게 보면 내가 태어난 시대의 운, 국가의 운, 부모의 운, 건강과 성품의 운, 리더의 운, 친구의 운, 업계의 운, 그날의 행운과 불운이 절묘하게 스파크를 일으켜 지금의 내가 있다. 그리고 운의 스파크는 ‘뛰어들 때’ 일어난다.

마흔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 내가 패션지 에디터에서 언론사의 문화전문기자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도 새 인물에 모험을 걸었던 리더가 그 순간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가항력을 인정하며 ‘뛰어든’ 나에게 신이 안겨주는 보너스가 ‘문득’과 ‘툭툭’이다. ‘툭툭’은 애써 생색내지 않으려는 그 가벼운 터치가, ‘문득’은 인과를 갖추지 않은 그 우연한 등장이, 기별도 없이 문 앞에 당도한 고향 언니의 택배 상자 같다.

‘살면서 은인은 만났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양희은은 ‘어느 날 문득 기적이 툭툭 내게로 왔다’고 설명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친의 빚을 노래로 갚으며 하늘에 삿대질을 하며 울던 이십대의 어느 날, 클럽에 노래 들으러 온 선교사가 선뜻 빚을 갚아주더라고.

도무지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다…. 막막한 순간에도 일단 뛰어들면, 페이스북의 변두리 지인이나, 네트워크 바깥의 편견 없는 누군가가 나타나 쓱 매듭을 풀어주었다는 경험자들을 자주 만난다. 절박했던 순간의 도움들은 그렇게 불현듯 바깥에서 찾아온 것들이다.

햇빛에 여문 밤송이가 때마침 지나가는 바람의 도움으로 툭 떨어지듯.

가을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수확의 날들 속에서 ‘문득’ 하늘의 귀여움을 받은 날들을 세어보아라. 예기치 않은 좋은 손님을 데리고 오듯 ‘도무지, 문득, 툭툭…’ 저 멀리서 은인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