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열린 리셉션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UPI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 하버드대의 외국인 학생 입국을 제한하고, 이란 등 12국 국민의 미국 입국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하버드대의 학내 반(反)이스라엘 기조 등을 공격하며 몇 달째 진행 중인 압박의 수위를 높이는 동시에, 첫 임기에 논란을 빚었던 ‘무슬림 입국 금지’ 조치를 사실상 되살린 것이다. 일각에서는 전방위적 관세 전쟁과 우크라이나·러시아 종전 협상 등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트럼프가 지지층 결집을 위해 고강도 이민 단속 조치에 나섰다는 해석도 나온다.

백악관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거나 교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자 하는 외국인의 입국을 중단해 국가 안전을 보호하는 포고문에 서명했다”며 “이에 따라 하버드대의 새 학생이 F(유학)·M(직업 훈련)·J(방문 연구) 비자를 통해 비(非)이민자로 미국에 입국하는 것이 중단된다”고 밝혔다. ‘학생 및 교환 방문자 프로그램(SEVP)’을 통해 미국 내 다른 대학에 다니는 유학생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사실상 하버드대만을 겨냥한 조치다. 미 정부는 하버드대에 재학 중인 외국인 유학생들의 비자 유지 여부는 개별 심사해 결정할 방침이다. 시행 기간은 일단 6개월로 설정됐다.

그래픽=백형선

백악관은 대통령이 안보를 위해 외국인 입국을 막을 수 있도록 한 ‘입국관리법’을 근거로 들었다. 백악관은 “하버드대가 외국인 학생의 불법적이거나 위험한 활동에 대한 정보를 국토안보부에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고, 중국에서 1억5000만달러(약 2038억원) 이상을 수령한 대가로 중국 공산당 무장 조직 구성원을 초청하거나 중국 관련 인물과 군사 기술 연구를 공동 수행했다”고 했다. 트럼프 역시 “외국 학생들이 우리나라(미국)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이에 하버드대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또 하나의 불법적 보복 조치”라며 반발했다.

미 국토안보부는 지난달에도 하버드대의 SEVP 인증을 취소하려 했다. 미국 대학은 정부에서 SEVP 인증을 받고 이를 근거로 외국 학생들에게 비자 발급에 필요한 ‘유학생 자격증명서(I-20)’를 발급해 준다. 따라서 SEVP 인증이 취소되면 유학생을 받지 못하게 된다. 하버드대가 인증 취소의 효력을 정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내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하버드대는 일단 유학생을 다시 받을 수 있게 된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나온 이번 입국 제한 조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AP는 “이번 지시는 (SEVP 인증 취소와는) 다른 법적 권한을 적용한 것”이라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의 지시가 유효한 비자를 소지한 하버드대 학생들의 입국을 막기 위해 정확히 어떻게 시행될지는 불분명하다”며 “트럼프가 발동한 법은 인권 유린이나 부패와 연루된 외국인을 표적으로 삼는 데 주로 사용돼 왔다”고 했다.

한편 트럼프는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등 12국 국민의 미국 입국을 9일부터 전면 금지하는 포고문에도 서명했다. 쿠바·베네수엘라 등 7국 국민은 관광 및 유학 목적의 비자 발급이 제한되는 ‘부분적 입국 제한’ 조치를 받는다. 다만 취업 비자 등은 예외로 유지된다.

트럼프는 “상당한 테러 조직의 존재 또는 국가의 테러 조장, 입국자 신원 확인에 비협조적인 태도, 비자 기한을 초과한 체류자의 증가” 등을 근거로 들었다. 특히 지난 1일 콜로라도주에서 친(親)이스라엘 시위대를 겨냥해 발생한 화염병 테러 사건을 거론하며 “심사받지 않은 외국인의 입국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보여줬다”고 했다. 이 사건의 용의자는 이집트 출신 불법 체류자였지만 정작 이집트는 이번 조치에서 제외됐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1기의 광범위한 이민 제한 조치가 부활하며 확대됐다”고 했다. 다만 당시 입국 금지국에 포함됐던 북한, 이번에 새로 포함될 것으로 전망됐던 러시아 등은 제외됐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3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북한·러시아 등 43국에 대한 입국 금지·제한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백악관은 북한 등이 제외된 이유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이번 발표는 미국을 해치려는 외국 세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려는 상식적 조치”라고 밝혔다.

트럼프는 첫 임기 중이었던 2017년에도 이란·이라크·시리아 등 이슬람권 7국 국민의 비자 발급과 입국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를 두고 ‘특정 종교를 차별한다’는 비판이 광범위하게 일었다. 이후 대상 국가에 북한도 추가됐다가, 해당 행정명령은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과 동시에 폐지됐다.

조선일보 국제부가 픽한 글로벌 이슈!
뉴스레터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