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현지 시각) 프랑스 칸 영화제의 본부로 쓰이는 ‘팔레 드 페스티발’ 3층. 영화제 관계자 10여 명에게 둘러싸인 채로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는 남자가 있었다. 프랑스 국민 배우 뱅상 랭동(62)이었다. 1988년 영화 ‘유 콜 잇 러브’에서 소피 마르소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음악가 역으로 국내에도 친숙한 배우. 2015년 ‘아버지의 초상’으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지난해 그의 출연작 ‘티탄’은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칸의 남자’인 그가 올해는 심사위원장을 맡아서 황금종려상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프랑스 영화인이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건 13년 만이다.
톰 크루즈 등 올해 칸을 찾은 쟁쟁한 할리우드 스타만큼이나 그의 일거수일투족에도 세계 영화계와 외신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개막 직전인 지난 14일 그는 르몽드 인터뷰에서 “현실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17일 개막식에서도 “영화는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고 무관심을 뒤흔드는 거대한 감정의 무기”라고 열변을 토해서 기립 박수를 받았다.
이 때문에 올해 사회적 문제를 부각시킨 영화들의 수상 가능성을 점치는 관측들이 쏟아졌다. 반면 개막 직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는 “여성 영화나 사회적인 작품 등 사전에 어떤 선입견도 없이 영화를 볼 것이다. 나는 마음으로 일하지 머리로 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레짐작이나 예단은 금물이라는 일반론이었지만, 또다시 그의 발언은 굵직한 헤드라인으로 뽑혀 나갔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한 ‘브로커’ 등 한국 영화 두 편도 올해 경쟁 부문 21편에 포함되어 있다.
칸 심사위원장의 발언 한마디에 전 세계 영화계가 따라서 춤추는 이유가 있다. 1953~1954년 심사위원장이었던 프랑스 문호이자 영화인 장 콕토부터 테네시 윌리엄스(1976년), 이브 몽탕(1987년)까지 당대 최고의 문화 예술인들이 이 직책을 맡았다. 그 뒤에도 스티븐 스필버그(2013년), 제인 캠피언(2014년), 코엔 형제(2015년), 스파이크 리(2021년) 같은 명감독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올해 심사위원장인 랭동이 “처음엔 장난 전화인 줄만 알았다. 수락 요청을 받고서 새벽 1시 넘어서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은 심사위원들의 호선(互選)이 아니라 집행위원장이 직접 임명하는 방식이라는 점도 독특하다. 랭동 역시 지난 4월 티에리 프레모 칸 집행위원장의 전화를 받고서 수락한 뒤 공식 발표하는 과정을 거쳤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은 주요 수상작의 향방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 심사위원장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격찬한 ‘올드보이’(감독 박찬욱)가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올해 경쟁 부문 심사위원은 모두 9명이다. 영국 감독 겸 배우 리베카 홀, 영화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웨덴 배우 누미 라파스, 덴마크 감독 요아킴 트리에르, 아프리카 이민자 출신의 프랑스 감독 라주 리 등이 포함됐다. ‘유럽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고 사회적 주제에 관심 많은 영화인들이 대거 포진한 것이 특징이다. 박찬욱과 고레에다 감독의 수상 여부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해서도 초반부터 관심이 뜨겁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23일)과 고레에다의 ‘브로커’(26일) 상영은 영화제 후반에 잡혀 있다. 아직 칸은 중간 반환점을 돌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