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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5일 수단 다르푸르 지역에서 내전을 피해 탈출한 수단 어린이들이 차드 아드레 외곽의 난민캠프에서 국제적십자사가 주는 식량을 얻기위해 줄을 서 있다./로이터 뉴스1

한 해를 돌아보는 연말이다. 2023년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쓰디쓴 실패로 점철된 해일 수도, 또 누군가에겐 일이나 사랑의 결실을 맺은 해일 수도 있다. 또 가장 더웠던 해이자 두 개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해이기도 하다. 여기, 올해를 설명하는 또 다른 문장이 있다. 갈수록 난민이 늘고 있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수십 년간 난민 규모는 꾸준히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한 건 올해 유난히 그 숫자가 폭증했다는 점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올해 9월 기준 전 세계 난민과 피란민은 약 1억1400만명으로, 지난해보다 160만명 늘었다. 수많은 사람이 전쟁과 이상 기후, 정치적 박해 등을 피해 자신의 집 혹은 국가를 떠났다.

난민을 원하는 이는 없다. 지난달 30일 만난 켈리 클레멘츠 UNHCR 부대표는 “대부분의 난민이 집 혹은 자국 근처에 머문다. 어떻게든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미래를 재건하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이들이 떠나는 건 막다른 길에서 내린 마지막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 마땅한 대안이 없는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대륙을 건너 낯선 땅에 기어코 발을 딛는다. 불청객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난민은 낯선 존재다. 여러 층위와 부류로 나뉘는 ‘소수자’란 집단 중에서도 가장 외적 차이가 두드러진다. 생김새와 사용 언어 간 차이가 클수록 이질감은 커진다. 이질감은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이 감정의 흐름이 잘못됐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두려움이란 감정엔 죄가 없다. 생존만이 목적이었던 시절부터 본능으로 새겨진 탓이다. 적을 구별하고 위험을 피하는 데 두려움만큼 유용한 도구는 없었다.

문제는 두려움이 우리를 집어삼킬 때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자신의 책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두려움이라는 원초적 감정이 혐오나 분노 등을 유발하며, 응집된 두려움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했다. 특히 이는 두려움을 과장하고, 때론 왜곡해 그것을 동력 삼으려는 정치인들로 인해 더욱 증폭된다. ‘난민이 유입되면 중범죄를 저지를 것’ 등의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다. 누스바움은 언뜻 절망적으로 보이는 이런 상황을 타개할 실마리를 던져줬다. 두려움이 민중 위에 군림하는 군주가 되지 않게 하려면 두려움의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

우리도 난민이던 시절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엄격히 말하면, 조선을 떠난 난민들이 세운 정부였다. 돌아갈 집이 사라진 이들은 이제 오늘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쉬운 해답이 있을 리 없다. 중요한 건 난민 문제가 빚을 우려와 공감의 와중에 오해를 풀고 이해를 찾는 일이다. 두려움이라는 장막을 걷어내는 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이제 곧 성탄. 서로의 온기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