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필립 딥비그 미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 경영대학원 교수와 거시경제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로 꼽히는 로버트 배로 미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오는 17~18일 열리는 제14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 참석한다. 금융 시스템 보호를 위한 중앙 정부의 역할을 강조해 온 딥비그 교수는 예금자 보호 제도의 중요성 등을 설명할 예정이다. ‘한국 위기와 극복(Korean Crisis and Recovery)’이라는 책을 공저한 대표적 지한파 학자인 배로 교수는 국내 경제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해법을 제시할 계획이다.
◇SVB 사태 예견한 필립 딥비그
필립 딥비그 교수는 은행 고객들이 예금을 대규모로 인출하는 ‘뱅크런’ 관련 이론적 모형을 제시한 공로로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뱅크런은 단기 예금을 장기 대출로 전환해주는 은행 본업의 속성상 언제나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시스템이 붕괴하지 않도록 예금자 보호제도와 같은 예방 조치가 필수적이라는 게 그의 핵심 주장이다. 미국 내에선 올 초 자산 규모 1754억달러(약 234조원)에 달하던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과 시그니처뱅크가 뱅크런을 일으키며 연달아 파산에 몰린 사태를 예견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현 금융 위기를 가장 정확히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적임자로 딥빅그 교수가 꼽히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ALC 참석을 앞두고 가진 본지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는 SVB 사태가 일어나고 우왕좌왕하다가 예금 전액을 보장해주는 조치를 내놓았다”며 “말을 도둑맞고 나서 마구간을 고친 격(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 격)”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미국 정부는 사태 초기 “전체 금융 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적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퍼스트리퍼블릭 등으로 뱅크런 사태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미 연방예금보험공사의 개입으로 퍼스트시티즌스가 SVB를 인수하며 급한 불을 껐지만 금융 시장 불안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경제 상황이 불안정하면 뱅크런 가능성도 커진다”며 “100% 완전한 예금 보호 장치가 있었다면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예금자 보호 한도가 미국의 6분의 1 수준인 5000만원인 것에 대해서도 그는 “모바일 뱅킹 사용이 많은 한국에선 뱅크런 발생 시 속도가 훨씬 빠를 것”이라며 “20년 전에 만들어진 예금자 보호 한도를 상향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조언했다.
◇로버트 배로 “한국 추가 금리 인상 부적절”
로버트 배로 교수는 규제 완화·고용·감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표적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다. 세계은행·영국 중앙은행을 비롯해 캐나다와 호주·이스라엘 등에서 통화·재정 정책의 자문 역할을 맡아 온 거시경제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그는 지난 2002년 앤 크루거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부총재 등과 함께 한국 경제와 관련한 저서를 쓰고, 2003년 한 달간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경제성장론 연구’를 강의한 대표적 지한파 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본지와 가진 사전 인터뷰에서 한국의 현재 기준 금리(3.5%)를 콕 집어 얘기하며 추가 금리 인상 절제 등 구체적 조언을 건넸다. 배로 교수는 “2021년 이후 누적 인플레이션이 미국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한국이 미 연준의 금리 상승 정책을 모방할 이유가 없다”며 “한국은행이 지나친 긴축 정책으로 대응하면 향후 심각한 경기 침체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은행은 인플레이션 대응 등을 이유로 2021년 8월 0.5%였던 기준 금리를 3.5%까지 올렸다.
일각에선 한국이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출 경우 한미 금리 차가 벌어져 국내 자금이 대거 미국으로 빠져나갈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이에 대해 배로 교수는 “미국의 높은 인플레는 실질 금리를 낮추는 역할을 하고 이는 달러 약세를 동반해 미국으로의 자금 회귀를 막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 주요 6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지난해 말 107을 웃돌았지만 1일 현재 101대로 6%가량 떨어져 달러 약세가 심화됐다.
배로 교수는 미국과 중국의 안보 갈등으로 인해 무역과 글로벌 공급망 왜곡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경고하며 선제적 대책이 필요할 것이란 조언도 건넸다. 그는 “미·중 갈등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같은 보호주의 경향을 가속화시킬 것”이라며 “특히 화웨이나 틱톡 같은 기업은 중국 정부의 대리인이며 이들과의 거래가 중국의 군사·정보 역량을 더 키울 것이란 우려가 더 강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배로 교수는 “중국 역시 민간 기업을 육성하고 정치적 자유화를 위해 나서던 모습이 점차 줄고 있다”며 “한국은 중국과의 경제 교역에 의존하고 있지만 이런 관계가 장기적으로 축소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