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명동점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지난 주말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의 잭슨홀 발언으로 29일 아시아 증시가 2% 이상 약세를 보였다./뉴스1

“지금은 금리 인상을 중단하거나 멈출 때가 아니다”라는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의 한마디에 한여름 뜨겁게 반등했던 세계 금융시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기준 금리 인상으로 ‘베어마켓(곰이 일어서서 앞발로 내려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하락장, 약세장의 뜻)’ 속에서도 상승 랠리를 보였던 세계 증시가 한순간에 추락했다.

지난 26일(현지 시각) 미국 증시가 3%대 폭락한 데 이어, 주말을 지나 29일 개장한 아시아 주요국 증시도 2% 넘게 가라앉았다. 코스피는 이날 2.18%, 코스닥은 2.81% 각각 하락했고, 일본 닛케이지수와 대만 가권지수도 각각 2.66%와 2.31% 내림세를 보였다.

지난 7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8.5%를 기록, 전월(9.1%)보다 하락하자, 미국 인플레이션이 정점을 지났다며 연준이 곧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출 것이라는 희망이 주식시장에 퍼졌다. 이른바 ‘파월 피봇(pivot·입장 선회)’ 기대 속에 S&P500 지수는 6월 저점에서 17%, 나스닥 지수는 23% 급등했다. 코스피 지수도 7월 초부터 이달 중순 사이 10.5% 뛰어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26일 잭슨홀 미팅에서 파월 의장은 “7월 물가 하락은 환영하지만, 연준이 원하는 수준에는 훨씬 부족하다”며 당분간 공격적인 금리 인상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강조하면서, 그간의 기대는 헛된 것이 되었다. 시장에서는 금리 인상이 올해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안재균 신한금투 연구원은 “잭슨홀에서 인플레이션 파이팅에 대한 연준의 의지가 재확인된 만큼, 연준에 대항할 시점이 아니다. 당분간 중앙은행에 맞서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26일 미국 와이오밍에서 열린 중앙은행 연례 심포지움에 참석한 제롬 파월 연준의장./AP 연합뉴스

◇“연준에 맞서지 마라…베어마켓 랠리는 끝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대표 지수인 S&P500 선물에 대한 매도 포지션이 지난 2년래 최고로 치솟는 등 미국 투자자들이 증시가 추가 하락하는 데 베팅하고 있다고 28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 집계치에 따르면 지난 23일 기준 S&P500 지수 선물에 약 26만 건의 공매도 포지션이 기록돼, 2020년 6월 이후 최고였다. 공매도는 특정 종목의 주가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면 해당 주식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주식을 빌려 매도 주문을 내는 투자 전략으로, 그만큼 주가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하는 투자자가 많다는 뜻이다.

당분간 연준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이 예상되면서, 미국 주식형 펀드에서도 돈이 빠지고 있다. 데이터 업체인 레피니티브에 따르면 지난주 미국 주식펀드에서는 12억달러의 자금이 순유출됐다. 8월 초까지만 해도 자금이 들어왔지만, 분위기가 일순간 바뀐 것이다.

채권시장도 약세를 면치 못했다. 이날 서울채권시장에서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직전 거래일 대비 0.128%포인트 오른 3.653%, 10년물 금리는 0.099%포인트 오른 3.715%를 기록했다.

현지 시간 26일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한 트레이더가 심각한 표정으로 전광판을 보고 있다. 이날 다우 존스 지수는 파월의장의 추가 금리인상 발언으로 1000포인트 넘게 하락했다./Getty Images/AFP 연합뉴스

◇연준발 증시 타격…'고통 사이클’이 시작된다

금리를 더 올리면→기업 이익이 줄어들고→결국 노동시장이 타격을 받아→가계 소득이 줄어드는 ‘고통 사이클’이 시작된다. 파월은 “물가상승률을 낮추는 사이 가계와 기업에도 일정 부분 고통이 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고통이 따르겠지만 그래도 물가를 잡는 게 우선이라는 의미다.

기업 이익은 줄어들 조짐이다. 미래에셋증권 집계에 따르면 최근 1달간 전 세계 기업들의 12개월 후 주당순이익(EPS) 전망치가 지난달 대비 1.3% 낮아졌다. 국가별로 보면 미국이 -1.8%였고, 한국은 -3.3%로 신흥국 중 가장 낙폭이 크다. 반도체 업종 전망이 크게 꺾인 여파다.

하나증권 한재혁 연구원은 “코스피의 베어마켓 랠리는 종료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연준의 긴축, 유럽에서 시작된 경기 침체 우려, 높은 원·달러 환율, 한국 무역수지 적자 지속 등이 주가 상승을 제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금 다른 전망도 나온다. 허진욱 삼성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곧 나올 미국의 8월 고용 증가 폭이 7월에 비해 상당 폭 둔화되고,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전월과 같거나 소폭 낮아진 것으로 나오면 9월 금리 인상 폭이 0.75%가 아닌 0.5%포인트가 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이 경우 증시 충격은 비교적 단기간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