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언어로 삶을 다시 시작한다. 부유한 사업가의 의뢰로 문화센터를 짓게 된 라즐로는 과감하고 혁신적인 설계로 반대에 부딪힌다. /유니버설 픽쳐스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콘크리트에 대해 “건축가의 생각을 표정으로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재료”라고 했다. 저렴하고 내구성이 뛰어난 데다, 거푸집에 시멘트를 붓기만 하면 어떤 형태든 자유자재로 만들어낼 수 있다. 브레디 코벳 감독의 ‘브루탈리스트’(12일 개봉)는 콘크리트 건축물을 닮은 영화다. 거칠어 보이지만 볼수록 대담하고 견고한 건물처럼 넋 놓고 올려다보게 된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이민한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의 굴곡진 삶을 따라간다. 유럽에서 천재 건축가로 이름을 날렸던 라즐로는 미국에선 건설 현장의 일용직으로 일하며 궁핍에 시달린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사업가 해리슨이 라즐로에게 지역 문화 센터를 지어달라 부탁하고, 라즐로는 온갖 역경 속에서 자신의 설계를 관철하기 위해 분투한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유니버셜 픽쳐스

동시에 영화는 관객의 마음속에 한 사람의 인생을 차곡차곡 지어 올린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난한 이민자, 마약중독자, 자본주의와 불화하는 예술가 등 라즐로의 여러 정체성이 하나의 건축물로 승화한다. 라즐로는 어둡고 답답한 현실에 갇혀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인물. 아무리 짓밟혀도 다시 고개를 드는 이민자의 질긴 생명력에 경외심마저 든다.

무려 3시간 35분의 상영 시간 동안 수십 년에 걸친 세월을 담아냈다. 장대한 교향곡처럼 1부가 끝나고 15분짜리 인터미션(중간 휴식)이 있고 2부가 이어진다. 30대 젊은 감독의 야심이 느껴지는 영화는 베네치아 영화제 감독상을 비롯해 골든글로브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 등 주요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있다. 3월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10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수상이 유력한 후보작으로 거론된다.

브루탈리즘의 거장, 마르셀 브로이어가 지은 미국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 /플리커(ajay_suresh)

제목은 ‘브루탈리즘’에서 따왔다. 1950년대 영국에서 전후 복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등장한 건축양식. 외장 마감 없이 콘크리트나 벽돌 같은 건축자재를 그대로 드러내고,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구조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흉물스럽다고 냉소를 받기도 했지만, 최근에 와서 날것 그대로의 원초적인 매력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영화 속 라즐로가 지은 브루탈리즘 양식 건축물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의 거칠고 외로운 삶과 닮았다.

영화계의 찬사와 달리 건축계에선 끔찍한 영화라는 혹평을 쏟아냈다. 가상의 건축가 라즐로 토스가 헝가리 출신 건축 거장 마르셀 브로이어의 삶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라즐로의 삶은 헝가리 출신,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유학, 1937년 미국에 건너간 브로이어의 궤적과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실제 브로이어는 하버드대 교수로 국제적 명성을 얻으며 승승장구했다. 고독한 천재 예술가와 천박한 자본가의 대결 구도가 진부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유니버셜 픽쳐스

인공지능(AI) 윤리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주연 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와 펄리시티 존스의 헝가리어 발음을 AI 기술로 보정한 사실이 편집자 인터뷰를 통해 뒤늦게 드러나면서, 오스카 수상 자격이 없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버라이어티 등 외신에 따르면, 아카데미 측은 사전에 AI 사용 여부를 공개하도록 오스카 출품 요건을 변경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갖가지 논란에도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만큼은 이견이 없다. 215분의 상영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배우가 가진 흡인력 덕분이다. 실제 헝가리 출신 이민자의 아들이기도 한 브로디는 라즐로를 실존 인물처럼 생생하게 빚어냈다. 결점투성이 인물이지만 깡마른 얼굴에 각진 눈썹이 아래로 기울어질 때마다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브로디는 영화 ‘피아니스트’(2002)로 최연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29세)을 받았던 배우. 또 한 번 유대인 역할로 아카데미에 도전하게 됐다.

☞브루탈리스트

1950~1970년대 유행한 건축 양식 브루탈리즘을 따르는 건축가를 말한다. 콘크리트 등 건축 자재를 그대로 드러내고, 기하학적인 구조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