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한순간에

모든 것이 유품

뭉게구름

一瞬(いっしゅん)にしてみな遺品雲(いひんくも)の峰(みね)

나의 책장에는 오래된 세계지도가 있다. 런던에서 출판한 포켓용 책자인데 펼쳐보면 지구의 구석구석이 네모난 칸 안에 축소되어 마치 판 초콜릿처럼 가지런하다. 1대2750만이나 1대6000만 같은 비율로 유럽, 아시아 등이 하늘색 바다에 둘러싸여 깨알같이 검은 글씨로 도시와 산맥 이름을 품고 있다. 맨 첫 장의 ‘더 월드(THE WORLD)’는 축척이 1대1억7500만이다. 맨 뒷장에는 검은 볼펜으로 적힌 아버지 이름.

나는 아홉 살 무렵부터 멍하니 이 세계지도를 들여다보곤 했다. 이렇게 어린 나에게, 이렇게 넓은 세상이 한 손에 들어온다. 그 기분도 썩 좋았지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도 곳곳에 그은 낙서를 발견하는 게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뉴욕, 몬트리올, 시카고 등은 중요한 도시였는지 파란색으로 칸을 쳤고, 함부르크에는 붉은색 체크가 되어 있으며, 태국, 필리핀에는 연필로 마구 동그라미를 그렸다. 남중국해(SOUTH CHINA SEA)에는 방콕을 출발하여 여러 주변 섬들로 향하는 뱃길 낙서가 분주하다. 이토록 열심히 세계를 들여다보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유품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아마도 모르고, 모른 채 앞만 보고, 열심히 하늘을 날지는 않았을까. 서른 즈음한 아버지는. 그 마음도 헤아려보면서.

가이 미치코(櫂未知子, 1960~)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 하이쿠를 썼다. 살아계실 때 어머니에게 속해 있던 물건들이 어머니의 죽음 이후 한순간에 유품이 된다. 그걸 하나둘 정리하며 고인과 작별하는 시간을 갖는다. 살아생전 어머니가 아끼던 물건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같이 생명을 잃은 것처럼 빛이 바래 보였을 것이다. 마치 물건에도 마음이 있어서, 자기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도 여기 이 잘 만든 세계지도는, 아버지의 유품이면서 내 안에서 빛을 찾았다. 이런 물건도 있다.

어버이날이다. 우리네 삶이 유한하다는 걸 알면서도, 살면서 잊기 쉬워 이런 날을 만들었으리라. 모든 것이 뭉게구름 속으로 쓸려 가기 전에, 하루쯤 부모님 얼굴을 보고 만지고 생각하라고. 일본어로 뭉게구름은 구름(雲)의 산봉우리(峰)다. 구름이 첩첩산중 봉우리처럼 쌓여서다. 부모 자식 사이 저마다 사연과 추억도 몇 만분의 1, 몇 억분의 1 축척으로 산봉우리 하나의 구름이 된다. 5월은, 다 같이 그 구름을 이야기하기에 참 좋은 계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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