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 8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엔 유례없이 사람이 북적였다. 대대적인 홍보 아래 출범하는 프로축구 ‘슈퍼리그’의 개막전이 열린 날이었다. 승용차, 냉장고, 세탁기 등 1700여 개 고가 경품을 내놓은 덕에 관중석은 물론이고 육상 트랙까지 약 3만명이 들어찼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시축으로 유공 코끼리와 할렐루야 독수리의 역사적인 첫 경기가 시작됐다. 유공의 박윤기(63·전 아산 유나이티드 감독)가 1호골을 넣은 끝에 1대1 무승부로 끝났다.
그로부터 프로축구 출범 40주년을 맞은 올 시즌, 25~26일 이틀에 걸쳐 전국 여섯곳에서 열린 K리그1(1부) 개막전에 총 10만1632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다. 이승우(25·수원FC), 황의조(31·FC서울) 등 유럽 무대를 누비다 온 한국 선수도 국내 무대를 밟았다. 세징야(34·대구FC), 일류첸코(33·FC서울)같이 주장 완장을 찬 외국 선수까지 있다. 관중 수부터 세계적인 선수들까지 40년 전에 비해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리는 대형 리그가 됐다.
◇강제 시작과 창대한 결과
40년 전 프로축구는 스포츠로 정치적 이슈를 덮겠다는 당시 정부의 반강제적 주도하에 출범했다. 준비 기간이 채 2년도 안 됐다. 첫 5팀 중 유공 코끼리는 개막 다섯 달 남짓을 남기고 급하게 꾸려졌을 정도다. 홈구장도 없이 9개 도시를 순회하며 경품으로 시민들의 구장 방문을 유도했다. 당시 리그에서 뛰었던 한 선수는 “유랑극단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월드컵 본선 연속 진출로 축구 인기가 나날이 늘어가고, 1990년 지역 연고제가 실시되면서 구단별 서포터스 활동 문화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97년 10구단 체제 완성, 1998년 K리그라는 고유의 명칭을 확정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을 기폭제로 관심이 커지면서 K리그도 규모가 꾸준히 커졌다. 2013년 최초로 1부와 2부 리그를 동시에 운영하는 22구단 체제가 완성됐고, 지금은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됐다.
◇모기업 의존하는 태생적 한계
올 시즌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가 사라지고,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의 호재까지 등에 업고 프로축구 인기가 더 높아질 조짐이 보이지만, 구단 관계자들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눈치다. 최근 기업들은 프로축구 구단으로 인한 브랜드 홍보 효과가 미미하고, 높아지는 리그 수준에 지출만 늘어간다는 이유로 지원을 줄이는 추세다. 한 구단 관계자는 “모기업이 투자를 줄이면 팀을 꾸릴 방법이 없다”며 “팬들의 성화와 모기업 눈치 사이에서 죽어나가는 건 우리뿐”이라고 했다.
모기업이 과도하게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지금의 구단 구조는 출범과 동시에 생겨났다. 당시 정권은 전해 출범한 프로야구처럼 대기업들이 구단을 하나씩 맡기를 사실상 강권했다. 당시 선경그룹(현 SK그룹)의 계열사인 유공이 유공 코끼리를, 현대자동차가 현대 호랑이 축구단을 급하게 창단하는 식이었다. 급조한 탓에 프로야구와는 달리 지역 연고지 없이 시작해 기업에서 모든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구조가 고착됐다. 최근 10여 년 동안 등장한 시민 구단 역시 지자체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에서 체계는 같다.
유럽 축구 구단들은 어떨까. 이들은 지역 주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뿌리가 다르다.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878년 노동자들이 쉬는 시간 모여서 축구를 하다가 만든 동아리에서 출발했다. 스페인 명문 FC바르셀로나는 1899년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던 축구 애호가 외국인들이 모여서 만든 일종의 조기축구팀이 지금에 이르렀다. 두 팀은 지난 100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지역민의 사랑을 받았다. 이는 관중 수입으로만 구단을 운영할 수 있고, 구단 수뇌부의 방만한 운영을 견제할 두꺼운 팬층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모기업의 부담을 덜어낸 지역 밀착형 구단이 더 늘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1~2년 만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구단이 연고지에 더 열심히 홍보하는 등 지역에 밀착하는 팀이 되기 위해 시간과 자본을 꾸준히 투자해야 한다”며 “그게 프로축구의 지속성을 키우는 방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