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은 장애인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경찰이 장애인 단체 관계자 2명을 불러 ‘4자 통역’으로 피해자 조사를 했다고 한다. 네 사람이 모여 3장짜리 진술서를 작성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다. 경찰에 이런 중복 장애를 겪는 시민을 조사할 인력이 없었던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연은 이렇다. 지난 14일 오후 5시쯤 서울 은평구의 한 빌라촌 골목길. 집 앞 수퍼에 가던 김모(61)씨가 지나가던 승용차 뒷바퀴에 왼쪽 발이 밟히는 사고를 당했다. 당시 운전자는 김씨를 보고 천천히 차를 몰았는데 김씨 발이 차에 밟힌 것이다.

운전자는 김씨가 보험사기단처럼 고의적으로 사고를 낸 줄 알고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관이 살펴보니 김씨는 시각과 청력을 모두 잃은 시청각장애인이었다.

어릴 때 청력을 잃은 김씨는 성인이 된 뒤 점차 눈도 나빠져 15년 전쯤 시력까지 잃었다. 누군가 곁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못 한다. 시력이 남아 있을 때 다녔던 지금 거주지 근처에서만 혼자 돌아다닐 수 있다고 한다.

경찰관은 김씨와 전혀 소통할 수 없었다. 결국 김씨가 다니던 장애인센터의 A씨, 김씨와 친분이 있던 조원석 한국시청각장애인협회 대표가 급히 서울 은평경찰서로 왔다.

/그래픽=박상훈

김씨는 시력을 잃기 전에 글을 배웠지만 10여 년이 지나 글씨로는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점자 사용법도 몰랐다. 그의 의사소통 수단은 ‘촉수어’였다. 손으로 수어를 하면 다른 사람이 그 손을 만져 이해하는 방식이다.

촉수어는 수어를 하는 사람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손의 움직임만 읽어 의미를 해독해야 한다. 손을 계속 얹고 있어야 해 일반 수어보다 동작이 훨씬 제한되고 체력 소모도 크다. 그래서 수어가 가능한 사람도 촉수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찰에는 이런 촉수어를 하는 사람이 없다.

그날 경찰관은 비장애인인 A씨에게 먼저 질문을 했다. 그러면 A씨는 시각장애인인 조원석 대표에게 크게 소리치거나 그의 손바닥에 글씨를 써 질문을 전달했다. 조 대표는 눈이 보이진 않지만, 왼쪽 청력은 미약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이어 조 대표는 다시 김씨에게 촉수어로 다시 질문을 전했다.

김씨의 대답은 그 반대 과정을 통해 경찰관에게 전달됐다. 김씨는 “저녁으로 먹을 라면을 사기 위해 수퍼에 가는데 지팡이를 깜박하고 두고 나왔다. 평소처럼 길 한쪽을 따라 천천히 걷는데 갑자기 차에 치였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의 진술서 3쪽을 쓰는 데 1시간가량 걸렸다. 바퀴에 깔린 김씨의 발은 퉁퉁 부었다. CCTV 등을 확인한 경찰관은 운전자도 안전 수칙을 잘 지켰다고 판단해 그를 입건하진 않았다.

원래 시각·청각장애인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관할 통역센터 등을 통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김씨와 같이 중복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별도 매뉴얼은 없다. 정부 차원에서 양성하는 촉수어 전문 통역인도 없다. 조 대표는 “시청각장애 특성에 맞는 전담지원사를 키워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건”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