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이범호 KIA 감독이 일본 오키나와 긴 구장에서 스프링캠프 훈련을 지휘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송정헌 스포츠조선 기자

전임 감독이 금품 수수 의혹으로 낙마하면서 사령탑을 잃은 프로야구 KIA는 이범호(43) 1군 타격 코치를 ‘소방수’로 세웠다. 연고지 ‘레전드’ 선동열(61)·이종범(54) 등 쟁쟁한 이름들이 후보로 거론됐지만, KIA는 차기 감독으로 이 코치를 승격시켰다. 친근한 ‘형님 리더십’으로 호랑이 군단 재도약을 노리는 이 감독을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만났다. 그는 “훌륭하신 선배님들과 함께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 영광이었다. 감독이 되리라는 생각도 욕심도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감은 넘쳤다. 그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갑자기 감독이 됐지만, 선수·코치로 십 수년간 몸담은 팀이다. 선수들과 항상 함께해 왔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첫 1980년대생 감독이다. 진갑용(50) 수석 코치 등 팀 내에 그보다 연배가 위인 코치들이 있다. 일각에서는 경력 없고 나이 어린 ‘초보 감독’ 지도력에 대한 우려도 제기한다. 이 감독은 “누구나 처음에는 겪는 일이다. 평가는 시즌이 끝나고 난 뒤 받겠다”며 “성적은 감독이 아니라 선수들이 만들어주는 것이고, 좋은 감독을 만드는 것도 좋은 선수들”이라고 했다.

이 감독은 부임 직후부터 ‘선수단과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감독과 선수가 격의 없이 대화하고, 선수들이 편한 마음으로 야구를 즐기도록 하겠다고 공언한다. 이를 위해 감독실 문을 항상 열어놓겠다고도 했다. 그는 “야구관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즐거움’”이라고 했다. 어릴 적 야구가 좋아서 시작했던 선수들이 클수록 야구를 즐기지 못하게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이 감독은 “선수 시절부터 생각하던 방향이다. 2군 총괄, 1군 타격 코치 할 때도 이 방식으로 지도했다”며 “선수들이 좋아하고, 스스로 훈련을 찾아서 할 줄 알게 되더라”고 했다.

어느 정도 위계질서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에는 “편하게 해줄수록 선수들이 스스로 선을 지킨다고 믿는다”면서 “내가 참고 희생해야 하는 것도 많겠지만, 그렇게 해서 선수들 컨디션과 경기력이 향상될 수만 있다면 이 길이 옳다고 믿는다”고 했다. 선수 시절 한화와 KIA에서 그를 지도했던 김인식·김기태 감독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선수들을 편안하게 해주시는 분들이었다. 훗날 지도자가 되면 그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전했다.

이범호 KIA 감독이 27일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NPB(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와 연습 경기에서 득점에 성공한 박찬호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뉴스1

KIA는 감독 선임 과정에서 내부 승격으로 가닥을 잡은 뒤 호주에 있던 이 감독(당시 코치)과 화상 면접을 진행했다. 유일하게 면접을 봤다. 사실상 내정한 셈이다. 면접에선 KIA 선수단 장단점,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문답이 오갔다고 한다. 이 감독은 “면접을 보고 나서도 내가 진짜 감독이 될 것이라고 생각 못 했다”며 “끝나고 나서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팀 단점은 선수들이 주눅 들어 있다는 것이고, 장점은 그것만 바꿔주면 최대치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부분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전임 감독 시절 그늘이다.

2019년 현역 은퇴 후 일본과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다녀온 이 감독은 “일본 선수들은 야구를 왜 해야 하는지, 야구가 직업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한다”며 “그런 간절함을 우리 선수들이 배우면 좋겠다”고 했다. 또 “미국 선수들은 단체 훈련 이외 시간에 개인 운동을 많이 하면서 각자 성장을 도모한다”며 “우리도 단체 훈련을 조금 줄여서라도 개인 운동을 할 시간을 보장해 주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든 우승에 도달할 수 있는 강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2009년, 2017년 우승 때를 돌아보면 그 직전 몇 시즌간 중하위권에 머물다가 한 시즌 ‘반짝’하는 경향이 있었다. 항상 중상위권에서 비슷한 성적을 내는 팀이 돼야 우승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며 “선수들이 부상당하지 않고 경기할 수 있게만 해주면 충분히 상위권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키워드로 ‘체력 관리’를 꼽았다. 그는 타격 코치 시절이던 지난 1월 구단 전력 강화 세미나에서 데이터 분석을 통해 KIA 타선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을 발표해 수뇌부에 좋은 인상을 남겼다. 6월만 되면 타자들 체력이 떨어져 공격력 침체가 자주 왔고, 이것이 지난해 1경기 차이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이 감독은 “시즌 초부터 주전들 체력 관리를 해주겠다”며 “한 번씩 선발에서 빼면서 휴식 효과를 주고 경기가 팽팽할 때 다시 투입하는 식으로 운영하면 이길 수 있는 경기가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감독은 팬들을 향해 전임 감독 사태에 대한 사과도 건넸다. 그는 “최근 몇 년간 성적도 기대 이하였는데 이런 일이 생겨서 팬들이 가장 힘들고 아쉬웠을 것”이라며 “시즌이 끝난 후 팬들이 즐거운 시즌이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잘 준비하겠다. 더 성장하는 KIA 타이거즈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