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계정 해킹당하셨나요.”

최근 건축가 유현준 홍익대 교수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일본 인기 만화 ‘진격의 거인’ 한 장면을 올리자 달린 댓글이다. 유 교수는 “여운이 너무 남는. 이제야 왜 완벽한 수미상관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음”이란 평과 함께 만화책 사진을 게재했고, 자신의 유튜브에도 이를 분석하는 50분짜리 영상을 올렸다.

만화책은 50대 남자 교수가 보면 해킹을 의심할 만큼, 흔히 ‘덕후’라 불리는 마니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2000년 초반 이마저도 웹툰에 밀리면서 전국 대부분의 만화방이 문을 닫았다. 그랬던 만화책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 3월 셋째 주 온라인 서점 예스24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일본 액션·코미디 만화 ‘사카모토 데이즈 20 트리플 특전판’(대원씨아이). 전설의 킬러였지만 은퇴하고 살이 쪄 푸근한 인상으로 바뀐 사카모토 타로의 일상 분투기를 그린 만화책이다. 지난 1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먼저 ‘오늘 대한민국의 TOP 10 시리즈’에 이름을 올렸다.

그래픽=양진경

넷플릭스·디즈니+ 등 글로벌 OTT가 만화책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에 날개를 달아주면서, 종이 만화책의 인기를 덩달아 이끌고 있다. 교보문고가 올해 1월부터 지난달 31일까지 상반기 도서 판매를 분석한 결과, 만화책 분야는 작년 동기 대비 9.8% 신장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1020세대뿐 아니라 3040세대에서도 만화책 구매가 많이 이뤄지는 등 만화책의 인기가 전 세대에 걸쳐 골고루 높았다. 슬램덩크 열풍 이후 반짝할 줄 알았던 만화책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 내부에서도 놀랐다”고 했다. 예스24에서도 올해 1월부터 지난 4월 10일까지 만화 분야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13.8% 늘었다. 5년 전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24.5% 증가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OTT의 대표적인 수혜 분야 중 하나로 꼽힌다. ‘만화는 아이들이 보는 것’이란 편견과 달리, 일본 업계는 ‘진격의 거인’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등 성인도 볼 수 있는 만화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OTT로 애니메이션 해외 유통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면서, 이 만화들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며 소위 ‘초대박’을 치게 됐다. ‘사카모토 데이즈’는 한국뿐 아니라 넷플릭스 ‘글로벌 톱 10 TV(비영어)’에서 10주 연속 이름을 올렸다. 2012년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 전체의 17%에 그쳤던 해외 매출 비율은 2023년 50% 이상으로 성장했고, 애니메이션 산업의 OTT 시장 수익은 2013년 340억엔(3276억원)에서 2022년 1650억엔(1조6000억원)으로 9년 만에 4.85배 늘어났다.

그래픽=양진경

만화책은 이런 애니 인기의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예스24 권문경 만화·라이트노벨 PD는 “만화는 일부 마니아층이 향유하는 콘텐츠로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지만, 최근 몇 년간 다양한 애니메이션 영화·시리즈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특히 1020세대에게 일상적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귀멸의 칼날’은 2021년 넷플릭스에서 시즌 1이 공개된 이후, 원작 만화 24권이 예스24 만화·라이트노벨 분야 베스트셀러 1위부터 24위까지 줄 세우기를 했다.

최근 만화책을 사는 이들은 새 내용을 빨리 알기보단, 소장에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다. 광주에 살면서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열렸던 만화 ‘주술회전’ 전시회에도 다녀왔다는 직장인 서모(28)씨는 “애니메이션을 먼저 봐서 내용을 다 알고 있지만, 책으로도 간직하고 싶어 주술회전 전권을 다 가지고 있다. 전시회에서는 좋아하는 인물의 굿즈를 사왔다”고 했다.

다시 종이 만화책이 팔리는 분위기에, 최근엔 한국 만화책이 복간되기도 했다. “난 슬플 때 힙합을 춰”란 대사로 유명한, 만화가 천계영의 ‘언플러그드 보이’ 1·2가 지난달 28년 만에 문학동네에서 다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