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2월 ‘남해도 무장 공비 사건’ 당시 대전함에 게양했던 태극기. 대전함 함장으로 간첩선 격퇴 작전에 참가한 독자 권정식씨가 간직해 왔다. 빛이 바랜 태극기에 ‘구축함 항해기’라고 적혀 있다. /권정식씨 제공

1980년 12월 1일 밤 경남 남해군 미조리 해안에 접근하는 북한 무장 공작원 3명이 발견됐다. 육군과 경찰은 2명을 사살하고 달아난 1명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미조리 남쪽 해상에서는 해군과 공군이 간첩선 1척을 발견하고 교전을 벌여 2일 오전 격침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토대로 재구성한 ‘남해도 무장공비 사건’이다. 사건은 달아났던 공작원 1명을 사살한 6일에 종료됐다. 간첩선에 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6명을 포함, 북한 공작원 9명을 소탕하고 간첩선 1척을 격침하는 과정에서 우리 장병 3명이 전사했다.

인천 독자 권정식(85·해사 15기)씨는 구축함 대전함의 함장으로 이 작전에 참가했다. “부산 앞바다부터 대마도 해역에 이르는 해상에 30여 척의 함정이 출동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대전함은 이 함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이 탑승한 기함(旗艦)이었다고 한다.

해군 소장으로 퇴역한 권씨는 작전 당시 대전함에 게양했던 태극기가 “둘도 없는 소중한 가보”라고 했다. 함장 근무를 끝내고 배를 떠나는 날 주임원사가 “함장님께서 간직해 달라”며 국기함을 건넸다고 한다. 태극기는 거센 바닷바람에 닳고 빛이 바랬다. ‘구축함 항해기’라는 문구와 함께 게양 장소 ‘대전함’, 게양 기간 ‘1980.1~1981.1′이라고 적혀 있다. 권씨는 “마스트 꼭대기에서 작전을 지켜보며 장병들을 격려했던 태극기”라고 했다.

당시는 제5공화국 초기이자 1981년 제12대 대선과 제11대 총선을 앞둔 시기였다. 대간첩대책본부는 “올 들어 6번째 도발”이라면서 중요한 정치 일정을 앞두고 국내 혼란을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판단했다. 1980년 들어 3월에 한강 하구에서 북한의 3인조 무장간첩이 사살됐고, 11월에는 전남 완도군 횡간도에 3인조 무장간첩이 나타나 민간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북한은 잠수함까지 동원한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 사건(1996)을 비롯해 공산권이 사실상 붕괴한 뒤에도 무장 공작원을 침투시키는 시도를 계속했다. 지금은 무장공비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지만, 북한의 지령을 받고 반정부 활동을 해온 혐의로 국내 조직이 검거되는 등 간첩단 사건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