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인근 ‘현대코아’ 상가 앞. 길이가 80m 정도인 철제 울타리가 인도를 둘로 나누고 있었다. 울타리 한쪽은 상가와 접하는 보도, 다른 한쪽은 버스 정류장이 있는 차로와 접하는 보도다. 이 버스 정류장은 일반과 직행, 마을버스까지 총 21개 노선이 지난다. 상가 쪽 보도에서 버스를 타려면 울타리를 빙 둘러 80m를 걸어가야 한다. 어른 어깨 높이의 울타리라 뛰어넘을 수도 없다. 이날 오전 7시 30분 경기 남양주시로 출근하려던 주민 신영철(67)씨는 버스를 놓쳤다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그는 “중간에 출입문이라도 뚫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청량리역 일대는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가 지나기로 하면서, 서울 강북 지역 핵심 거점 중 하나로 떠오른 곳이다. 그런 곳에 이런 불편한 버스 정류장이 생긴 건 거리 노점과 구청, 인근 상가와 주민 간 갈등 탓이다.
이 울타리가 생긴 건 작년 12월 9일. 그전까지 이곳에는 잡화점과 분식 포장마차, 점집 등 17개 노점이 20년 넘게 장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인근 상인들이 “노점상 때문에 피해가 크다”고 항의하자, 동대문구는 2019년 6월 무분별한 노점을 정비하겠다며 ‘거리 가게 허가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노점상 판매대를 설치해 허가받은 사람만 정해진 장소에서 장사할 수 있는 제도다. 그런데 구청이 작년 말 판매대를 설치하기 위해 노점상들이 손수레 등을 잠시 치운 사이, 상인들이 그 자리에 기습적으로 철제 울타리를 세웠다. 노점상 판매대를 아예 설치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울타리가 생긴 곳은 상가 사유지로, 울타리 설치에만 60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울타리가 생기자 차로 쪽 인도가 1m 남짓만 남게 됐다. 구청은 서울시와 경찰에 요청해 지난 4월 말 울타리 너머 차로 쪽으로 인도 폭을 1m가량 넓혔다. 버스 정류장은 인도 한복판 섬처럼 덩그러니 놓인 지금의 모습이 됐다. 상인과 인근 주민들은 “구청이 차로를 좁혀가며 노점 만들 땅을 마련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차로가 좁아지면서 인근 교통 정체만 더 심해졌다는 지적도 나왔다.
노점과 상가, 주민의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현대코아상가 관리단 이복선 관리위원장은 “노점상이 있었을 땐 대낮에 술 먹고 상가 화장실을 드나드는 이들이 많았고, 담배 냄새도 심했다”고 했다. 버스 정류장 앞 상가 1층에서 5년째 옷장사를 하고 있다는 김만환(62)씨는 “손님들은 통행이 불편해도 악취가 없고 깨끗해진 지금이 훨씬 낫다고 한다”고 했다.
인근 한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도 집단행동을 벌이고 있다. 2023년 입주를 앞둔 이들은 동대문구청 민원 게시판에 최근까지 3000개 넘는 항의 글을 올렸다. 5월 초에는 노점 철거를 요구하는 주민 1만명 서명도 냈다. 반면 노점 상인들은 “여기서 나가면 생계도 걱정이고 갈 곳도 없다”며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구청도 주민과 상인, 노점들 사이에 끼어 아직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구청 관계자는 “주민과 상인, 노점상 등으로 구성된 협의체를 꾸려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며 “거리 가게 허가제를 10년 단위로 맺으면서 점차 노점을 줄여가는 게 목표”라고 했다. 기존 노점을 17곳에서 8곳까지 줄이겠다는 제안도 내놓았다. 하지만 상가 관계자나 주민들 가운데 “노점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 타협안이 나오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