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들은 언제나 마지막에 등장한다. 제75회 칸 국제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19일 밤(현지 시각) 뤼미에르 대극장 앞. 자정을 불과 12분 앞두고 배우 이정재와 정우성이 나란히 레드 카펫을 밟았다. 이정재가 감독·주연과 각본 공동 작업까지 ‘1인 3역’을 맡고, 정우성이 함께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헌트’가 세계에서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인 ‘헌트’는 대중성을 갖춘 장르 영화들을 심야 상영하는 비경쟁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받았다. 이정재는 올여름 국내 개봉을 앞두고 세계 최고의 영화제에서 먼저 감독으로 데뷔한 셈이다. 이정재·정우성은 1999년 영화 ‘태양은 없다’ 이후 23년 만에 다시 연기 호흡을 맞췄다. 이정재는 사전 인터뷰에서 “12년 전 영화 ‘하녀’로 처음 칸 영화제에 갔을 때 ‘내가 한번 더 올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연출로 찾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이정재와 정우성 모두 이번이 두 번째 칸 영화제 방문이다.
이들은 차에서 내린 뒤 현지 팬들의 사인 공세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일일이 응했다.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에는 어깨동무를 하고서 포즈를 취했다. ‘헌트’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이후 이정재가 처음으로 국제 무대에 선보이는 작품이다. 이 때문에 19일뿐 아니라 20일 네 차례 추가 상영까지 모두 매진을 이뤘다.
이날도 ‘티켓 구함’이라는 팻말을 들고 상영 2~3시간 전부터 극장 앞에서 기다리는 현지 팬들이 적지 않았다. 프랑스 명문 EM리옹 경영대학원생 에마 라미레즈(21)씨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부터 깊이 있는 사회물까지 독특하고 색다른 시각을 선보이는 작품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태원 클라쓰’와 ‘펜트하우스’까지 대부분 챙겨보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정재·정우성은 티에리 프레모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의 환영을 받으며 극장에 들어갔다. 이들의 입장에 극장 2300여 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영화 초반 대형 스크린에 ‘헌트’의 제작사와 투자 배급사, 제작진의 이름이 나올 적마다 어김없이 환호는 계속됐다. 영화관이 아니라 인기 팝스타의 콘서트장에 온 것만 같았다.
‘헌트’는 1980년대 한반도를 배경으로 안기부의 두 차장인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의 대립과 협력을 그린 첩보 액션물이다. 조직 내부에 침투한 스파이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빚어내는 팽팽한 긴장감이 극적 동력(動力)이라는 점에서는 ‘버디 무비(두 남자 배우가 콤비로 출연하는 영화)’를 닮았다. 23년 전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두 배우가 방황하는 청춘의 표상이었다면, 지금은 노련하고 원숙한 첩보원 역이라는 점이 차이점이다. 영화에서는 ‘초보 감독’ 이정재의 야심과 약점을 모두 엿볼 수 있었다. 황정민·이성민·전혜진·허성태·조우진·박성웅 등 화려한 출연진을 바탕으로 총격과 폭발 장면 등 아낌없이 화력을 쏟아부었지만, 영화적 스케일을 키우려다 보니 가끔은 이야기가 듬성듬성해지는 아쉬움도 남았다.
영화가 모두 끝난 시간은 새벽 2시 10분쯤. 칸의 한밤을 두 남자가 책임진 셈이었다. 종영(終映)을 알리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7분여간 기립 박수가 잦아들지 않자, 1층 객석에 앉아 있던 이정재는 즉석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 영화를 즐기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메르시 보쿠(Merci beaucoup,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두 배우는 객석에서 일어나 서로를 얼싸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