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풀의 탄생

문태준 시집|문학동네|104쪽|1만2000원

“빗방울의 심장이 뛰네/ 바라춤을 추네/ 산록(山綠)이 비치네/ 빗방울 속엔/ 천둥이 굵은 저음으로 우네/ 몰랑한 너와 내가 있네“(‘잎사귀에 여름비가 올 때’ 중에서)

제주 애월읍 장전리에서 산 지 다섯 해가 지난 시인은 “생명 세계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갖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연하게 소생하고, 힘줄처럼 억세지는” 풀의 모습을 본뜬 시집을 냈다. 그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숲 속에 있는 것 같다. 듬성듬성하게, 멈추고, 쉬고, 곁을 두는 그런 시”라고 했다. 시인의 말에는 이렇게 쓴다. “풀밭의 살림을 일궈 풀과 산다. (…) 풀은 울고, 웃는다. 풀은 어디로부터 와 이 세계를 푸르게 흔드나."

문태준의 아홉 번째 시집이자 3년 만에 펴낸 신작 시집.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력 30년을 채운 그는 ‘한국 서정시의 수사(修士)’로 불린다. 운문이라는 시의 본령에 충실한 창작을 해왔다. 문태준의 시는 읽는 이에게 소박한, 그러나 드넓은 기쁨을 준다. 그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시집이다. 풀벌레로 분한 시인이 여름을 앞두고 보내는 편지 같기도 하다. “잎사귀는 푸른 지면(紙面)/ 너에게 여름 편지를 쓰네“(같은 시)

자연(自然)이 인간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애쓰지 않아도 순리대로 흘러가는 도도한 흐름 앞에서 인간은 작아지고, 겸허해진다. “눈송이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네/ 안간힘을 쓰지 않고/ 숨이 참 고르네/ 손 쓸 필요가 없지/ 여파(餘波)도 없지/ 누구도 무너지지 않아/ 저 아래,/ 벙싯벙싯 웃고 있는 겨울 허공 좀 봐” (‘안간힘을 쓰지 않고’ 전문). 큰 노력 없이 천천히 내리는 눈송이는 잔물결조차 일으키지 않는다. 대신 그 아래에서 고요한 겨울의 적막만 미소 짓는다.

시인은 어린아이도 알 법한 소박한 문장으로 고요한 풍경을 그린다. 홍용희 문학평론가는 “그가 펼쳐 보이는 고요의 세계는 우리의 눈과 귀를 틔워주고, 자연의 비경 속에서 어느덧 우리의 본모습과 마주하게 한다”고 쓴다. “앞이 없고 뒤도 없는 풀밭 길을 바람이 지나간다/ 조랑말의 잔등을 쓰다듬듯이// 어린 조랑말 한 마리가 풀밭을 온다”(‘풀밭’ 중에서). 우리는 그 어린 조랑말을 물끄러미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