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때 ‘왕뚜껑’ 소리를 들었다. 사회부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하던 시절, 대충대충 일하는 후배 기자를 보면 열이 뻗쳐 매섭게 잡아 족쳤다는 그는 작가로 변신한 뒤에도 꽤나 깐깐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에세이 소제목 하나도 얼추 짓는 법이 없어, 하나 마나 한 말로 얼버무렸으면 곧장 뚜껑이 열렸고, 일하면서 적당히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작가라 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의 원고를 받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면서, 나는 그에 관한 숱한 범상치 않은 소문에 바짝 긴장해 있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까다롭다는 소문이 있는 작가를 좋아하는 편집자였다. 작가란 자신만의 까다로움으로 세상도 사람도 일도 뭐 하나 만만하게 보지 않는 사람이고, 고수란 ‘이렇게까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까다롭고 세밀하게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직접 만난 서명숙 작가는 ‘왕뚜껑’이 아니라 ‘왕언니’였다. 그는 열을 내며 자기 얘기를 하기에 앞서 가만히 내 얘기를 들어주었고, 마침내 함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나는 그가 느닷없이 화를 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건 내가 그의 뜻과 취향을 거스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만큼 완벽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세월이, 그가 심호흡하며 무수히 걸은 올레길이 일에 완벽을 기하면서도 사람에게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일을 풀어가는 방식까지 그에게 귀띔해준 게 아닐까 추측만 해볼 뿐이다.
제주에 있는 그의 집에 찾아간 일도 여러 번 있다. 세계적 관광 명소인 제주 올레길을 만든 주인공이니 제주에 대궐 같은 집까지는 아니라도 멋들어진 단독주택쯤은 짓고 살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오래된 그의 작은 빌라는 그의 책을 만든 이후로 묘하게 연이 되어 제주로 이주한 우리 집 본가보다도 자그맣고 단출했다. 의아해하는 내게 서명숙 작가는 등기만 내 이름으로 안 돼 있다뿐이지, 제주 폭포랑 바다, 온 천지가 내 집 정원이고 마당이나 다름없는데, 그걸 꼭 내 집 울타리에 가둬둘 이유가 없지 않으냐며 호탕하게 웃었다. 처음에 동생과 함께 제주 올레길을 만들 때 이 길 만들어 호주머니 채우지 말자고 단단히 약속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멀쩡히 언론사에서 일하던 그가 어느 날 고향 제주로 와서 길을 내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네가 무슨 불도저냐? 도로공사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기막혀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길 내는 여자가 되었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그가 사랑한 고향 섬의 미래를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인생을 선망해온 내게도 어느 날 중요한 기로에 서는 순간이 왔다.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익숙하게 일해온 울타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할까 말까 망설일 무렵이었다. 망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과 더는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는 마음이 복잡하게 엇갈렸다. 고민하는 내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절벽에 내몰리면 대부분 안 떨어지려고 벼랑 끝에 매달려 버둥거린다. 그런데 벼랑 끝에서 안간힘을 다해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그 손을 놓아야 할 때가 있다. 사람들은 다 그 손 놓으면 죽는 거라고, 저 아래는 지옥이고 늪이라 말할 테지만, 아니다. 과감하게 손 놓아봐라. 그러면 전혀 모르던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아래 초록 풀밭 깔려 있을 때가 있다. 내가 그랬고, 너도 그럴 것이다. 네가 살아온 시간만큼, 삶만큼 날게 된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저 바닥에 뭐가 있을지 두려웠다. 흔들리는 내 눈을 보면서 서명숙 작가가 말했다. “내가 네 풀밭이 되어줄게.”
나는 그렇게 내 출판사 이야기장수를 차렸다. 최근 출간한 ‘형사 박미옥’은 서명숙 작가가 내게 소개하여 완성한 책이다. 한국 최초 강력계 여형사이자 강력반장인 박미옥 형사가 서귀포경찰서에 부임하자 올레길을 함께 걸으며 무려 3년 동안 당신은 책을 써야 한다고 끈질기게 권했다 한다. 인간의 바닥과 꼬락서니를 당신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그 이야기는 공유되어야만 한다고. 그는 그렇게 나에게도, 작가로 변신한 형사 박미옥에게도 초록 풀밭이 되어주었다.
오늘도 그는 제주 올레길 어딘가에서 심호흡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제주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길을 터주고 길이 되어주는 사람, 그것이 내가 아는 길 내는 여자 서명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