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함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이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떠나지 않는 것은, 난데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할 사람도 알지 못하고 나도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서다. 별 대단한 말도 아니어서 잊으면 될 텐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달콤함에 대해 생각하다 ‘미드(mead)’를 떠올렸다.
다른 말로는 벌꿀술. 벌꿀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달겠나. 인류 최초의 술이라고 하는 이 술이 오랫동안 궁금했다. 누군가는 맥주가 인류 최초의 술이라고 주장하는데, 시시비비를 가릴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문자가 없던 시대이니 기록도 없을 테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어떤가 싶다. 각자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필요한 일 같아서다. 최초로 술을 만든 게 그리 대단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들이 추구하는 바를 위해서라면 뭐. 맥주든, 와인이든, 미드든,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마시고 싶긴 했는데 그리 간절하지 않았다. 나는 역시 ‘최초’라거나 ‘최고’라는 수식어에 그리 끌리지 않는 것이다. 믿는 것은 나의 느낌 정도. 다른 사람이 좋다고 내게 다 좋을 리 없고, 어제는 좋았던 게 오늘은 싫을 수도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대기현상과 그에 따라 변하거나 변하지 않는 나의 기분에 기대어 고른다. 그게 술이든, 다른 무엇이든. 타이밍이다. 술에도 타이밍이 있다고 생각한다. 술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일치하는 때라고 해도 좋다.
미드와 나와의 타이밍은 잘 맞지 않았다. 술을 마실 주체인 내가 미드에 그리 끌리지 않았던 것이다. ‘달 것이다’ 말고는 어떤 맛이나 향도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에. 술은 달아야 제맛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 걸로 아는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달기만 하면 안 된다. 달면서 시거나, 달면서 쓰거나. 아니면 달면서 진하거나, 달면서 이를 데 없는 향기가 나거나. 그래야 술이라고 생각해왔다. ‘술이 익는다’는 것은 여러 맛이 경쟁하고 또 화합하며 각축을 벌이는 과정이고, 술을 열었을 때 농익은 이 맛들이 액체로, 기체로 풀려나와야 한다고. ‘스르르’ 말이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런데… 신과 반신(叛神)이 각축을 벌이는 북유럽 드라마를 보다가 미드가 마시고 싶어졌다. 아주 간절히 말이다. 성게알에 랍스터에 굴에 이런저런 술을 꽤나 호화롭게 마시다가, 주연(酒宴)의 주최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계속 이딴 것만 마실 수 없지’라고. 그러고는 이제 제대로 된 걸 마시자며 탭(술이 나오는 꼭지)을 연다.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고서. 참고로 배경은 가정집이다. 노르웨이 에다에서 가장 부유한 집이라고는 해도 무려 탭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탭은 금으로 되어 있다. ‘금꼭지’랄까. 이보다 더 휘황찬란한 등장이 있을까?
탭을 열자 술이 콸콸 쏟아지는데, 미드다. 주최자는 말씀하신다. 고대부터 마시던 술이라고. 바이킹이 마셨고, 거인과 신, 영웅들도 마셨다고. 솔직히 말하면 누구나 감당하진 못한다며 주인공의 호승심을 자극한다. 주인공 망네는 순박하고 착하지만 덩치가 크고, 알고 보면 고집도 힘도 센 청소년인데, 주인공답게 전혀 주춤하지 않는다. 감당하지 못해서 탈이 나면 어쩌지 따위는 고민하지 않고 그냥 들이붓는다.
술잔도 심상치 않다. 동물의 뿔로, 입에 닿는 부분은 금으로 감쌌다. ‘전통을 추앙하지 않고 업그레이드한 건가? 아니면 위세를 과시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정통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정통의 방식은, 뿔잔의 입이 닿는 부분이 은으로 되어 있다. 고대부터 마시던 술이라며, 그 술을 바로, 지금, 우리가, 여기서 마심을 주최자가 거듭 강조하기 때문에 은이 아닌 게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금으로 된 구연부를 신성모독이라고 느꼈다. ‘거인과 신, 영웅들이 은(銀)잔에 마신다고? 나는 까짓것 금(金)잔에 마시겠어.’라는 이글거림을 보았달까.
그래서 마셨다. 도저히 마시지 않을 수 없어서. 내가 거인과 신, 영웅은 아니지만 거인과 신, 영웅이 마시는 술이 먹고 싶어서 마셨다. 나와 미드 사이의 타이밍이 찾아온 것이다. 미드는 한동안 잘 만들지 않다가 요즘 미국에서 꽤나 붐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마신 것은 런던의 고스넬사에서 만든 고스넬스 런던이다. 다른 향을 가미하지 않은 오리지널이라 이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았고, 라벨이 가장 마음에 들기도 해서. 뭘 알고 산 건 아니고 와인앤모어에 갔을 때 이게 마침 보였다.
망네는 어떻게 되는가? 아무렇지 않다. 아니, 오히려 본연의 뭔가가 깨어나서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힘을 발산하고 싶어 한다. 그대로 두기에는 가두어진 힘이 너무 강력해 그걸 쏟아내지 않을 수 없다. 토르이기 때문이다. 맞다. 그 토르. 오딘의 아들이자 로키의 형으로 좀 우둔한 편이지만 묠니르라는 강력한 망치를 지닌 토르. 이 드라마의 이름은 ‘라그나로크’로 북유럽 신화 속 세계 종말의 날을 뜻한다. 라그나로크 신화에서 신은 법과 질서를 지키려 하고, 거인은 불안과 혼돈을 조장하므로, 망네에게 술을 마시게 한 이와 그들의 가족은 거인이라 하겠다. 망네가 미드를 마시고 반응할 거라고 생각해 판을 벌인 것이다.
그는 격렬히 반응한다. 쉬지 않고 미드를 다 들이켜고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미친 맛인데요? 마셔본 것 중 최고예요.” 북유럽 신화에서 묘사되는 토르는 힘이 센 만큼 술도 세다. 장기가 뭐냐고 물으면 술을 잘 마신다며, 바닥내지 못하는 술은 없다고 말할 정도. 힘 자랑 못지않게 주량 자랑도 하는 우직한 캐릭터랄까.
좋아하는 토르 이야기는 이거다. 구연부가 은으로 된 뿔잔을 내면서 거인은 세 번에 걸쳐 이 술을 마시는 나약한 이는 없었다고 말한다. 토르는 나약하게도 세 번에 걸쳐 이 술을 마시는데 겨우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만 줄어 들어 있다. 사색이 된 거인은 고백한다. 사실, 네가 마신 뿔잔은 가장 깊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고. 토르가 바닷물 수위가 낮아질 정도로 들이마셔서 조수를 만들어냈고, 그 조수간만의 차는 영원할 거라고. 대단하지 않나? 나는 그 덕에 파도가 치는 소리를 생각할 때마다 토르가 바닷물을 들이마시는 장면을 상상하게 되었다.
내가 마신 벌꿀주의 병목에는 이런 글자가 있었다. ‘honey’, ‘water’, ‘time’. 꿀과 물과 시간으로 이 술을 만들었다는 거였다. 단순하지만 근사하지 않은가? 내가 속어를 쓰고 그러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럴 때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겠다. ‘쩐다.’ 요즘 미국에서는 ‘rad’라고 한다고. 병을 따니 꿀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이 냄새를 맡으며 생각하는 것이다. ‘새 술은 언제나 좋다. 새 생각 하게 하니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