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앤드루 왕자 결혼식 때는 만삭이었는데도 밤샘 캠핑을 했답니다. 역사적인 대관식인데 비용이 문제겠습니까. (왕이 없는) 미국엔 이런 거국적 행사가 없어 아쉽습니다.”
찰스 3세 국왕의 대관식을 이틀 앞둔 지난 4일(현지 시각) 런던 버킹엄궁 부근에서 만난 도나 워너씨는 미국 동부 코네티컷 주에서 왔다고 했다. 캠핑 장비를 챙겨 비행기를 탔다는 그는, 찰스 3세의 초상이 붙은 모자를 쓰고 인도(人道)에서 노숙 중이다. 6일 열리는 대관식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1953년) 이후 70년 만에 열린다.
도로 옆 인도엔 텐트 200여 개가 늘어섰다. 이곳은 오는 6일 버킹엄궁을 출발할 국왕의 황금빛 ‘다이아몬드 주빌리 마차’가 대관식 장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이동할 때 지나가는 길목이다. 국왕 부부와 왕실의 마차를 볼 수 있는 ‘명당 자리’를 확보하려고 전세계에서 모인 이들의 밤샘 야영(野營)이 시작됐다. 길에 텐트가 촘촘히 늘어선 이 길은 ‘찰스 왕의 캠프(King Charles’s Camp)’란 별명으로 불린다. 이 천막의 바다 곳곳에선 영국 국기로 온몸을 치장한 이들이 지나가는 관광객을 반겼다. 지난 2일 오전 4~5개에 불과하던 이곳 텐트들은 3일 오전 40여 개, 4일 오후 200여 개까지 불어났다.
◇전 세계 ‘왕실 덕후’ 총집결
왕실 행사에 줄곧 따라다니며 야영을 불사하는 ‘왕실 덕후(열성 팬)’들은 대관식을 앞두고 일찌감치 진을 치고 있었다. 영국 전역에서 대관식 행렬을 보러 온 이들부터 뻑적지근하게 화려한 왕실 행사가 부러운 미국인, 아프리카·남미 등 세계 곳곳에 있는 영(英)연방 국가 사람들도 많았다.
카리브해의 영연방 국가 자메이카에서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샤메인 스카이어스씨는 “찰스 국왕은 영연방 국가를 하나로 단합시키는 좋은 왕이 되리라고 기대한다”며 “특히 국왕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어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대관식에선 가장 먼저 입장하는 성직자 행렬에 영국 국교인 성공회 외에도 무슬림·힌두·시크·유대교가 동참한다. 아울러 백인 귀족 남성만 대관식 물품을 옮기던 관행을 벗어나 여성·흑인 등이 참석한다고 알려졌다.
대관식을 기다리며 텐트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몸은 고단할지 몰라도 대관식에 대한 기대감으로 흥분한 모습이었다. 패트릭 오닐(북아일랜드 벨파스트)씨는 “역사의 최전선에 서기 위해 이곳에 왔다”며 “같은 대상(왕실)에 애정을 두고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넷으로 나뉜 영국을 화합으로 이끄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앤 달리(웨일스)씨는 “여기 모인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차와 과자를 나눠 먹고 있다”며 “함께 대관식을 기다리며 동지애를 실감한다”고 했다. 이들은 주변에 있는 왕립 공원인 ‘세인트제임스 공원’ 화장실에서 세안과 용변을 해결하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머리에 영국 국기를 두른 존 로리씨는 “대관식 열흘 전에 왔다. 내 텐트가 ‘1호’였다”며 웃었다. “2013년 조지 왕자가 태어날 때도, 2015년 샬럿 공주가 태어날 때도 병원 앞에서 노숙한 적이 있습니다. 내 평생 처음 열리는 대관식인데 빠질 수는 없지요. 현장에서 목격하려니 엄청 흥분되고 떨리네요.”
‘찰스 왕의 캠프’를 지키는 ‘동지’들은 밤이 오면 샴페인 등을 나누며 일찌감치 축제 판을 벌이는 모습이었다. 영국 북동부 더럼에서 온 바틀리 그레이엄씨는 “지난해 여왕 장례식 때 여왕의 관을 보기 위해 30시간 줄을 섰다가 탈진했었다”고 했다. “이후 뇌졸중을 앓는 등 고생했지만 며칠 전 퇴원을 했고 곧장 여기로 달려왔습니다. 대관식은 나에게 치유이자 구원입니다.”
◇인파 관리 위해 차근차근 통제
대관식을 앞두고 버킹엄궁 일대에 사람들이 운집하기 시작하자 정부는 안전사고에 대비해 ‘인파 관리’를 시작했다. 지난 2일 오전 버킹엄궁 앞 차도는 개방된 채 사람들이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었고, 차도 양옆 인도에 텐트를 치는 것도 허용됐다. 그러나 3일에는 차도가 전면 통제됐고, 텐트는 한쪽 인도에만 칠 수 있게 됐다. 반대편 인도에는 화장실과 식수대, 의료센터, 기념품 판매점 설치가 예고됐다.
마니아들의 열광과 달리 영국 국민의 여론은 싸늘한 편이다. BBC가 영국 성인 30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64%가 “찰스 3세의 대관식에 관심이 없다”고 답했다. 3일 버킹엄궁 공식 기념품점 앞에서 만난 20대 여성 엠버 샤펠씨는 “찰스 국왕 기념품을 구경하러 왔다가 그냥 엘리자베스 여왕 기념품(찻수건)을 사서 돌아간다”며 “영국에서는 여왕이 다스리는 시절에 국력이 융성한다는 속설이 있다. 찰스 국왕은 인기가 별로 없고, 많은 이들이 ‘여왕의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