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소녀상'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배어 있다.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면서 무참히 짓밟힌 소녀들의 꿈이 고스란히 담겼다. 전범국 일본의 진심 어린 반성을 바라는 마음도 녹아 있다. 2011년 12월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최초로 건립된 소녀상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매년 그 숫자를 늘려가고 있다. 현재 국내 43곳, 해외 6곳에 설치됐다.
"이렇게 사랑받을 줄 몰랐어요. 그저 소녀상에 얽힌 역사를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처럼 생각해주길 바랐는데, 그 마음이 통했나 봐요." 지난 6일 소녀상 제작자 김운성(53)·김서경(52) 부부가 말했다.
◇반성 없는 일본에 분노… 소녀상 만들기로
중앙대학교 조소과 동기인 두 사람은 1989년 결혼해 함께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담은 공공 조형물을 주로 제작한다. 부부는 "의로운 일을 할 기회가 생기면 둘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게 된다"면서 "소녀상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2011년 1월 남편 김운성씨는 우연히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수요 시위하는 장면을 접했다.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 이후 2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 찾아가 도울 일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정대협 측은 수요 시위 1000회를 맞는 12월 14일, 일본대사관 앞에 '기념비'를 설치하고 싶다며 디자인을 부탁했어요.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고 아내도 동참했죠."
기념비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퍼지자 일본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반성 없는 일본의 모습에 격분한 두 사람은 좀 더 의미심장한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고민 끝에 당시 일본에 끌려간 13~15세 소녀의 조각상을 기획했다. 김서경씨는 "애초 기획은 '기념비'였는데 일본의 태도 때문에 '소녀상'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둘은 사명감을 갖고 작업을 시작했다. 특히 공들인 부분은 얼굴이다. 소녀상으로 피해 여성 전체를 대표하기 위해 옛 사진들을 찾아보며 그 시대 보편적인 얼굴을 표현했다. 김서경씨는 "할머니들의 고통과 슬픔, 분노를 드러내고자 얼굴만 100번 넘게 수정했다"면서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일본대사관 앞에 건립하는 소녀상이었기에 표정에서 '당당함'이 느껴지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제작 과정에서 딸 소흔(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의 의견도 반영됐다. 둘은 "할머니 그림자도 넣어보면 어떠냐"는 딸의 조언대로 소녀상 뒤에 오랜 시간 피해자들이 겪었던 아픔을 할머니 그림자로 나타냈다. "요즘 우리 딸이 '나도 공동 제작자인데 왜 엄마, 아빠만 인터뷰하느냐'며 불만을 털어놔요(웃음)."
◇살아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 조각상으로 제작
소녀상의 모양은 크게 여섯 가지로 나뉜다. 의자에 앉은 모습, 손에 동백꽃을 들고 서 있는 모습, 등에 날개를 단 모습 등이다. 부부는 남해 숙이공원에 마련된 소녀상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꼽았다.
"위안부 할머니의 사연이 담긴 소녀상이에요. 열여섯 살 때 친구와 조개를 캐다가 일본군에 잡혀간 박숙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토대로 의자 위에 소쿠리와 호미를 놓았죠. 당시 일본이 소녀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역할도 합니다."
소녀상은 시민들에게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되고 있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하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받쳐주는 사람들이 있어 소녀상은 외롭지 않다. 김운성씨는 "예전에 한 중학생이 받는 이의 주소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소녀상에게'라고 써서 편지를 부친 적이 있다"면서 "우체부 아저씨가 그걸 마치 사람에게 전달하듯 소녀상의 손에 쥐여주는데 뭉클했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소녀상을 눈엣가시로 여기며 건립을 막고 있다. 김운성씨는 "작년 9월로 예정됐던 독일 소녀상 건립이 일본의 거센 항의로 무산된 적 있다"고 했다. "이런 일본의 태도가 오히려 일본군위안부를 알리는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외국인들은 '일본이 왜 저렇게까지 하지?' 하면서 소녀상에 담긴 역사를 찾아보게 되지요."
요즘 부부는 소녀상 대신 '위안부 할머니' 조각상을 만드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수요 시위에 가장 많이 참가하신 김복동(91), 길원옥(89) 할머니의 현재 모습을 조각상으로 제작 중이에요. 두 분을 시작으로 살아 계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한 사람씩 조각상으로 만들어 드릴 겁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찾아내 조각상으로 만드는 일도 계획하고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