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비누 방울 놀이에 신난 아이들이 철로 위에서 뛰어놀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이들이 받은 선물이었다. 2024. 12. 멕시코 베르크루즈 주/ 사진가 양희석

창작의 순간 32. 양희석 사진가의 ‘벽으로 가는 길’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는데 갑자기 기차 경적 소리에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이 기차가 맞는지 몰라 허둥대고 있을 때 사람들이 기차에 올라탔고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몰렸다. 나는 무서워서 탈 수 없었다. 기차를 타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얼마나 간절하면 저 열차를 탈 수 있을까? 그만큼 나는 간절하지 않은 것인가”

늦은 밤, 갑자기 출발하는 기차에 이주민들이 올라타고 있다. 난 너무 좁은 공간에 많은 이주민이 몰려 있어서 난 이 열차를 탈 수 없었다. 2024. 12. 멕시코 베르크루즈 주/ 사진가 양희석
화물열차를 타고 북쪽으로 가는 이민자들. 긴장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화물열차위에는 혹시나 일어날 습격을 막기위해 주워놓은 돌멩이들이 놓여 있다. 2024. 12. 멕시코 / 사진가 양희석

이 글은 양희석 사진가(51)가 남미 이민자들과 함께 미국 국경으로 향하며 기록한 2024년 12월 18일의 메모다. 이민자 카라반(Migrant Caravan)으로 불리는 이들은 최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집권하면서 멕시코에서 국경으로 넘어오는 불법 이민자 통제가 강화되기 전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사진가 양희석은 지난 2023년 12월부터 6개월간 그리고 2024년 12월부터 3개월간 카라반과 함께 멕시코를 횡단하며 사진으로 촬영했다. 이러한 노고로 지난 달 26일엔 서울 용산전자랜드홀에서 여러 다큐 사진가들의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거쳐 올해 온빛 후지필름상 최우수상으로 양희석의 ‘벽으로 가는 길’이 선정되었다.

기차 지붕 위에 남미 이민자들과 함께 타고 가는 사진가 양희석. 이들은 기차 지붕 위에서 12시간 동안 타고 가기도 한다. 함께 열차 위에 탄 이민자가 찍어주었다./ 사진가 양희석

양희석은 나이 오십이 되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사진이었다. 오래전부터 사진을 찍었지만 직업과 병행하면서 원하는 사진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3년 전 생일에 아내가 “왜 요즘은 사진 안 찍어?”라며 “나이 들면 당신 좋아하는 사진 찍게 해줄게”라고 약속한 것이다. 아내는 사진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다큐 사진을 시작한 그의 주된 관심사는 ‘벽’이었다.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고 세상을 분리하는 벽을 사진으로 찍고 싶었다.

12시경 하루의 목적지에 도착한 카라반 일행. 어른들은 지쳐 쓰러져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파나마에서 온 레오와 그의 동생은 오랜만에 만난 놀이기구가 반가운지 매달려 놀고 있다. 2025.02. 멕시코, 와하카 주/ 사진가 양희석
비 내리는 이른 아침 화물 열차를 기다리던 한 여성이 검은 비닐 봉투를 걸치고 지붕 위를 걷고 있다. 검은 비닐 봉투는 화물 열차를 타려는 이민자들에게 추위와 비를 막아주는 좋은 도구다. 2024. 12. 멕시코 베라크루즈 주 /사진가 양희석

쓰레기봉투를 입은 여인의 아침

남미뿐 아니라 지중해를 건너는 아프리카 이민자들, 전쟁을 피해 집을 떠나는 팔레스타인 이민자 등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이민자들의 행렬 사진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렇지만 양희석은 불법 이민자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에 이들의 고귀함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고 했다. 이번 온빛사진상에 제출한 사진들 중 사진가가 좋아하는 사진 한 장을 꼽았다. 검정색 쓰레기봉투를 입은 여인이 칫솔을 들고 지나가는 모습이었다. 여인은 하룻밤에 7000원 하는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 건물 한쪽에 있는 화장실을 가서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이민자들이 늦은 밤 북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자야 할 시간에 길을 떠났기 때문일까 아빠의 어깨에 올라탄 아이는 지쳐 잠이 들었다. 2024. 02. 멕시코, 와하카 주/ 사진가 양희석

멕시코에서 미국 국경으로 향하는 이민자들은 대부분 영어를 못했다. 사진가는 멕시코시티에서 2개월간 어학원을 다니며 스페인어를 배웠다. 이민자들과 깊은 이야기까지는 어려워도 최소한의 소통을 위해서였다. 목숨을 건 이민자 행렬을 따라다니기 위해 양씨는 짐도 가볍게 준비한다고 했다. 더위와 강도를 피해 새벽에 출발하는 이민자들은 1000명에서 많게는 4000명까지 엄청난 인원이 이동한다. 어린이를 데리고 출발한 가족들이 수개월간 멕시코를 걸어서 미국 국경 앞까지 오면 거대한 장벽이나 강에 도착한다.

차 타이어에 판자를 덧댄 작은 보트를 탄 이민자들이 기대감과 걱정으로 강을 넘어 과테말라에서 멕시코에 들어온다. 강을 건너 오는데는 1달러를 지불한다. 벽으로 가는 긴 여정에는 2개의 큰 어려운 지역이 있다. 하나는 라셀바라고 불리는 콜롬비아와 파나마 사이의 정글 (정식명칭 : Darian gap)과 멕시코다. 많은 이민자들은 라셀바 보다 멕시코가 훨씬 위험하고 힘들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2024. 02. 멕시코, 치아파스 주 멕시코와 과테말라 국경/ 사진가 양희석

남미의 불법 이민자들은 베네수엘라가 약 25%로 가장 많고, 아이티와 온두라스, 니카라과 등 대부분 정치와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 상황이 나쁜 나라들이다. 고향을 버리고 힘들고 위험한 길을 떠나는 이민자들은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 많은데 그 이유가 자신이 사는 곳에서 “더 이상 안전하게 아이를 키울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에콰도르에서 온 제니와 다른 한 여성이 달리는 화물 열차에서 떨어졌다. 매년 화물 열차를 타려는 많은 이민자들이 기차에서 떨어져 죽거나 불구가 된다. 이민자들이 타는 화물 열차는 La bestia(야수)라고 불린다. 2024.12. 멕시코 베르크루즈 주/ 사진가 양희석

기차에서 누군가 떨어졌다, 사진을 찍을까 내려가서 도와야 할까?

9개월간 멕시코에서 이민자 행렬을 따라가면서 양희석은 수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직면했다. 하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사진을 못 찍었던 경험이었다. 이민자들에게 차를 태워주는 건 불법이지만 사진가는 나이 든 사람을 태워줬다고 카르텔에게 렌터카를 샅샅이 조사받으며 경고를 당했다. 카르텔은 일종의 마피아다. 카르텔은 이민자들과 쉽게 국경을 넘는 방법을 거래하는데 미화로 1만 달러(한화로 1,400만원)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빠르게 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고 했다. 이런 불법 조직까지 개입하기에 이민자들의 행렬은 더 험난하고 함께 다닌 사진가도 어려움이 많았다.

타파출라로 걸어가던 이민자들이 이민국과 카르텔의 감시를 피해 지나가던 버스에 몰래 올라타고 있다. 버스 기사들은 보통 이민자들을 태우지 않는다. 이민자들을 버스에 태우다 카르텔에 걸렸을 경우 보복을 당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2024. 02. 멕시코, 치아파스 주/ 사진가 양희석

한번은 화물차를 타려던 여인이 땅에 떨어진 것을 목격했다. 내려가서 도울 것인가, 사진부터 찍을 것인가 고민할 겨를 없이 본능적으로 셔터를 누른 후 사진가는 곧바로 기차에서 뛰어내려 여성을 찾았다. 출발하던 기차라 느린 속도여서 뛰어내릴 수 있었고, 역 주변에서 이민자 행렬을 돕던 시민단체와의 연락 끝에 여인을 만나서 무사한 것을 확인했다. 짐을 줄이기 위해 카메라 최소 장비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가능했다. 남미 이민자들 외에도 양희석은 이스라엘과 전쟁이 나기 전 팔레스타인을 여러 번 다녀왔다. 올해 온빛사진상 심사위원들은 양 씨의 작업이 “긴 여정의 복합성과 인간 존재의 존엄을 집요하게 추적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화물 열차의 지붕에 올라탄 이민자들 반대편에서 오는 다른 열차의 불빛이 나타나자 바라보고 있다. 2024.12. 멕시코 베르크루즈 주/ 사진가 양희석
4개 월째 사타드 후아레즈에 머물고 있는 피델은 과테말라에서 왔다. 그는 이곳에서 차 유리창을 닦으며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미국으로 갈 방법을 찾고 있다. 바로 도로 건너편이 미국 엘 파소다. 2025. 02. 멕시코 치와와 주/ 사진가 양희석

다큐멘터리 사진의 진정성과 예술성을 지향하며 새로운 사진가들을 발굴해온 온빛다큐멘터리(회장 김성민)가 주최한 온빛사진상이 올해로 14회째를 맞은 가운데 2025년 수상자로는 양희석 외에도 김예현의 ‘노맨스랜드’(온빛 씰리사진상), 고은희의 ‘K-55’(온빛 신진사진가상), 윤창수의 ‘우리는 모두 이주민이다’(온빛 프로젝트상) 등이 선정되었다.

사진가 양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