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에는 때가 되면 농기계가 돌아다니는데 밭에서는 왜 사람들이 무리지어 다닐까?”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이 고민이 머지않아 해소될 전망이다. 한국 농업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밭농업 기계화’가 정부와 연구기관의 전방위적인 노력으로 전환점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논농업의 기계화율은 99.7%에 달하지만, 밭농업은 67%에 그치고 있다. 정부는 2026년까지 밭작물 기계화율을 77.5%로 끌어올린다는 목표 아래, 농촌진흥청을 중심으로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농진청은 올해 양파 정식기, 수확기, 배추 정식기 등 밭작물 기계 7종을 개발해 현장 보급에 나섰으며, 2027년까지 무·콩 파종기, 고구마 수확기 등을 추가 개발할 계획이다. 권재한 농촌진흥청장은 24일 “고령화와 일손 부족으로 신음하는 농촌에 밭농업 기계화는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라고 했다.
◇기계화의 난제들… 해답은 ‘현장 중심 접근’
그동안 우리나라 밭농업 기계화가 더뎠던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밭은 경사지에 위치한 경우가 많고, 경지 면적이 작고 모양이 불규칙해 효율적인 기계 개발이 어려웠다. 또한 배추·고추·양파·마늘 등 작목이 다양해 작목별, 생산 과정별 맞춤형 기계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시장 규모가 작아 민간 투자가 제한적인 데다, 영농 규모가 영세해 저비용 고효율의 기계가 요구되는 점도 난관이었다.
특히 성능 좋은 기계를 개발했더라도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상용화되기 어려운 점도 문제였다. 배추 정식기의 경우 90㎝ 두둑에 2줄 심기가 일반적인 전남 해남에는 적합하지만, 40㎝ 두둑에 1줄 심기가 보편적인 강원 태백에서는 활용이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농진청은 기계 개발뿐 아니라 기계화에 적합한 품종, 표준화된 재배 모델과 유통 모델, 밭기계 기업의 지속성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농진청은 8대 밭작물(배추·무·마늘·양파·감자·고구마·콩·고추)에 대해 기계화 여건을 분석하고, 현장 간담회와 전문가 자문을 거쳐 ‘병목 공정(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생산성이 떨어지는 공정)’을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장비 도입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며, 생산·유통·시장까지 포괄하는 입체적 해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계에 맞는 품종·재배 방식, 기계화 생산물 유통·가공 체계가 함께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농진청 관계자는 “밭농업 기계화율을 높이려면 단순한 장비 도입만으로는 불가능하다”며 “생산부터 유통, 시장까지 현장을 중심으로 한 입체적 해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일본 사례 벤치마킹… 민간 협력으로 ‘시너지’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밭농업 기계화를 추진했다. 농업·식품산업기술종합연구기구(NARO)를 중심으로 1993년부터 ‘긴프로 사업’을 통해 농기계 업체와 공동 연구를 추진하고 실용화를 촉진했다.
일본은 주요 밭작물 생산 전 과정에 대한 기계를 보급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작목별 생산업체 간 컨소시엄을 구성해 지원하고 있다. 또한 표준 재배 양식, 육묘 기술 등 매뉴얼을 제공해 현장 보급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완전 무인화된 로봇 트랙터, 이앙기, 콤바인까지 개발했다. 농업 관련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농업 지원 플랫폼인 ‘WAGRI’도 운영하고 있다.
우리 역시 정부, 민간 기업, 연구 기관, 지자체가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하고 민간과 공동 연구 및 실증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기계화에 맞춘 재배 방식, 표준 품종 도입 등 다방면에서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민간과 함께 만든 기계 현장 실증 돌입
농진청은 우수 기술을 보유한 민간기업과 손잡고 배추·양파 정식기, 감자 파종기, 고추 정식기 등 7종의 작목별 맞춤형 기계를 공동 개발 중이다. 이 기계들은 지역별 수요 조사를 기반으로 설계되어 실효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까지 기계 개발을 완료하고, 주산지를 중심으로 현장 실증을 진행할 예정이다. 농업인을 대상으로 관련 교육 프로그램도 병행한다.
최근 개발을 완료한 배추·고추 범용 정식기는 현장 활용성과 기계 성능, 범용성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농가와 민간 기업이 공동으로 시제품을 테스트해 상용화한 사례다. 현장 실증에 참석했던 농민은 “고령화와 인건비 상승 문제를 범용 정식기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농진청은 2023년부터 마늘, 양파를 시작으로 ‘재배 기술-농기계-수확 후 저장 기술’이 연계된 기계화 재배 모델도 개발하고 있다. 표준 재배 양식, 육묘 기술 등 재배 기술부터 저장 기술까지 포함한 기계를 패키지화해 보급할 계획이다.
농진청은 농식품부와 공동 운영하는 밭농업 기계화 연구협의체를 통해 정책-연구개발(R&D)-현장을 아우르는 협력 체계도 구축했다. 이 협의체는 민간, 지자체, 농업인, 연구자가 함께 참여하는 구조로, 실제 현장 문제 해결에 집중하고 있다. 협의체 관계자는 “연구실에서 만든 시제품이 농업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개발 초기 단계부터 농업인과 기업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고 있다”며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기술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 목표”라고 했다.
◇밭농업 기계화가 바꾸는 농업의 미래
밭농업 기계화는 단순히 노동력 절감을 넘어 농업의 전 과정 표준화와 정밀화를 가능하게 하는 시발점이다. 품종 선택부터 파종, 생육, 수확, 저장, 유통까지 이어지는 전체 농업 프로세스의 정밀화를 통해 농업인의 노동력을 절감하고 소득을 높일 수 있다.
앞으로는 기계화에 디지털 기술이 결합된 ‘스마트 밭농업’으로 확장될 전망이다. 작물 생육 데이터, 토양 환경 정보, 기상 예측 등을 종합 분석해 작업 계획을 제시하고 기계가 자동으로 작업을 실행하는 체계로 발전될 것이다.
권재한 농촌진흥청장은 “밭농업 기계화는 밭에 기계를 넣는 것이 아니라, 농업의 미래를 설계하고 농촌의 삶을 바꾸는 혁신”이라며 “우리 농업의 지속 가능성과 경쟁력을 동시에 높이는 국가 전략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