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 즉 ‘이상향(理想鄕)’은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선호하고 추구해온 개념이다. 성경 속 에덴동산, 플라톤의 이데아(Idea),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 등은 인류가 도달하고자 꿈꾸는 이상 세계를 상징한다.
오늘날 현대인은 기술의 발달, 소비 자본주의의 팽창, 정보 과잉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손끝 하나로 전 세계 정보를 검색하고, 버튼 하나로 원하는 물건을 집 앞까지 받을 수 있다. 이러한 편리함은 과거 학자나 예술가들이 상상했던 ‘낙원’에 가까운 조건을 제공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현대인은 끊임없이 경쟁하고 비교하며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는 과연 ‘낙원’이라 부를 수 있을까?
◇21인(팀) 융복합 예술 작품으로 만난 ‘낙원’
문화역서울284는 오는 7월 27일까지 이상향과 행복의 의미를 조명하는 ‘우리들의 낙원’ 전(문화체육관광부 주최/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주관)을 개최한다. 과거 서울역에서 사람들이 느꼈던 ‘출발’ ‘설렘’ ‘기대’ ‘위안’ 등 장소성을 되새기며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낙원의 의미를 예술로 풀어낸다.
이번 전시에는 △가상현실 △사진 △설치 △영상 △몰입형 미디어아트 △인공지능 △조각 △회화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5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됐다. 구성연, 노진아, 문경원&전준호, 양정욱, 정연두, 하태범 등 한국 현대 작가 21명(팀)이 △자연과의 조화로운 공존 △우리가 행복을 꿈꾸며 살았던 곳과 살아가는 곳 △욕망 추구의 일상 △미래의 이상향에 관한 탐색과 비판을 주제로 ‘낙원이란 무엇인가’를 각기 다른 이상향과 융복합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1층 중앙홀에서는 고미술과 현대 기술이 결합된 몰입형 미디어아트를 감상할 수 있다. 정선의 ‘금강내산’에서 영감 받은 작품과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을 모티브로 제작된 두 점의 미디어아트는 높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전시장은 관람객의 MBTI(마이어스-브릭스 성격유형 지표)에 맞는 여행의 길(관람 동선)을 따라 탐색하도록 배치했다. 1층 서측 복도에서는 ‘행복상점’이 운영된다. 이곳에서는 △밑미(마음 성장 프로그램) △소요서가(철학 서적) △패치킹(자수 상품) △프린트베이커리(예술 상품) 등 다양한 문화예술 창작물을 구매하거나 체험할 수 있다. 참여 작가 윤동천과 협업한 치유 프로그램 ‘희망약국’도 함께 열었다.
◇근대문화유산이자 문화예술 분야 창작과 교류의 현장
‘우리들의 낙원’ 전이 개최되는 아트플랫폼 문화역서울284(구 서울역사)는 올해 개장 100주년을 맞았다. 지난 5월에는 첫 번째 기획 전시 ‘서울백화점-로컬 투 서울 100 다이어리(Local to Seoul 100 Diaries)’를 선보여 관람객들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이 전시는 전국 각지 명소를 소개하며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구 서울역사 가치를 되새기는 자리였다. 또한 앞으로 100년을 이어갈 수 있는 100여 개 지역별 생활 문화 브랜드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서울백화점-로컬 투 서울 100 다이어리’는 각 지역의 맛·멋·놀이를 체험과 판매 형태로 구성했다. 지역 특색과 문화 자원을 알기 쉽게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었다. 지역 브랜드는 팝업스토어에 참여해 인지도를 높이고 수도권으로 시장을 확대하는 기회도 얻었다.
구 서울역사는 1925년 준공돼 2004년까지 교통과 교류의 관문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였다. 2011년 서울역사의 원형을 복원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롭게 개관한 것이 문화역서울284다. 근대문화유산이자 문화예술 분야 창작과 교류의 현장으로 역사적인 맥(脈)을 잇고 있다. 문화역서울284는 전시·공연·워크숍·공간 해설 프로그램 등 다양한 복합 문화프로그램을 연중 진행하고 있다.
올해에는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 전시 △지역 주민과 함께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 개발 △건축 문화재로서 의미를 담은 공간 투어 등 더욱 다채로운 기획을 선보여 국민과 함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할 계획이다.
[최진희 전시예술감독 인터뷰]
“수많은 이들의 출발과 도착, 기대·희망 품었던 옛 서울역서 다양한 의미의 여정 기리려 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관하는 문화역서울284 기획 전시 ‘우리들의 낙원’은 최진희 전시예술감독의 기획과 연출로 구성됐다.
최 감독은 2021년 서울문화재단의 기술기반예술 지원 전시 ‘언폴드X(Unfold X)’ 융합예술전시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2023년 서울라이트 제1회 한강빛섬축제에서 레이저와 미디어아트를 아우른 대형 공공 전시 프로젝트도 총괄한 바 있다.
―전시의 기획 배경은 무엇인가?
“이번 전시는 옛 서울역 준공 100년이 상징하는 장소적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다. 누구에게는 어디론가 떠나는 ‘시작의 공간’이었고, 누구에게는 먼 여행과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안도와 위안의 장소’가 됐던 곳에서 이뤄지는 전시다. 여러 장르의 한국 현대 융합예술 작품들로 다양한 의미의 여정을 기리고자 했다. 각자의 다른 이상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체험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삶에 관한 가치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들의 낙원’이라는 따뜻한 전시 제목에 이끌려 방문한 관람객이 ‘와우, 낙원이다!’가 아닌 ‘전시된 작품들이 낙원들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지?’ 하고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 전시 의도 중 하나다. 몇몇 소수 작품을 제외하고는 낙원이란 주제로 처음부터 만들지는 않았다. 기획자로서 우리들의 이상향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작품들을 선별해 재구성했다.”
―융복합 예술은 어떤 것이며 이번 전시에서 이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융복합 예술이란 서로 다른 분야인 미술·음악·무용·연극 등을 결합하거나 예술에 기술, 과학 등을 결합해 탄생한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나 창작 활동이다. 이러한 장르의 실험적 결합으로 시청각과 공감각적 경험이 더해져 더욱 풍부한 체험형 작품이 된다. 현재 한국은 뚜렷한 기술적 우위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초기 수용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를 반영한 한국의 기술 기반 융합예술의 선진성을 젊은 작가들 작품으로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기획전은 이러한 최근의 발전상을 함께 포함해 융복합 예술로 기획하는 것이 관람객에게 한국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더욱 잘 체험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선정 작가들의 특징과 전시 구성에 대해 소개해 달라.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 중심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들을 주축으로 했다. 전시의 구성은 제작 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순차적·직선적(chronological) 형태가 아니라 △자연과 조화로운 공존 △우리가 행복을 꿈꾸며 살았던 곳과 살아가는 곳 △욕망 추구의 일상 △미래의 이상향에 관한 탐색과 비판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분류하고 엮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의 몰입감이다. 모든 전시관을 다 관람한다면 다채로운 한국의 이상향에 관한 예술적 담론들이 시각화된 형상들을 동시적(synchronic)으로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만은 꼭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옛 서울역은 문화 체험이라는 여정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역서울284로 변화했다. 특히 본래 서울역의 여러 공간은 이번 전시를 통해 다채로운 작품들로 채워져 낙원에 관한 상상력의 은유적 여행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과거·현재·미래의 이상향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과 만난다면 ‘나만의 행복과 낙원은 과연 무엇이며 어디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