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리자 덕유산국립공원 숲 속에 설치된 은막(銀幕) 앞에 관객이 하나 둘 모여 앉았다. 이들은 돗자리를 깔고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파벨만스’를 감상했다. 계곡물이 흘러내리며 만드는 청량한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지난해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야외 상영장’으로 불리는 숲 속 극장에서 펼쳐진 풍경이다. 숲 속 극장은 해발 700m 덕유산국립공원 중턱, 무주구천동 33경의 한가운데 위치한 대한민국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극장이다.
올해도 숲 속 극장에서 영화 축제가 열린다. 내달 5~9일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과 덕유산 일대에서 개최되는 ‘무주산골영화제’. 2013년부터 시작된 이 영화제는 어둡고 사방이 막힌 극장이 아닌 자연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어 ‘휴양 영화제’라는 명성을 얻었다. 올해 12회를 맞은 무주산골영화제는 총 21개국 96편의 영화를 선보인다. 황인홍 무주군수(무주산골영화제 조직위원장)는 29일 “산골영화제는 자연 속에서 휴식과 낭만을 주제로 진행되는 국내 유일의 휴양 영화제다”며 “낭만적인 영화 소풍을 통해 관객들에게 다시없을 시간을 선사할 것”이라고 했다.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 라이브’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 라이브’는 6월 5일 오후 8시 무주 등나무운동장에서 상영된다. 장강명 작가의 베스트셀러 동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원작이다. 20대 후반의 ‘계나(고아성)’가 행복을 찾아 뉴질랜드로 떠나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선정 이후 처음 공개된다.
영화는 라이브 공연과 결합한 ‘영화 공연’ 형식으로 상영된다. 장건재 감독이 총연출을 맡고 권현정 음악감독이 음악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서 배우로 활약한 뮤지션 김뜻돌과 이현송 밴드가 영화 음악을 라이브로 들려준다.
올해 한국 장편영화경쟁부문 ‘창’ 섹션도 개성 넘치는 작품이 대거 출품됐다. 창 섹션에선 한국영화의 지평을 넓힌 동시대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올해엔 100편이 넘는 작품이 출품됐다. 이 가운데 뛰어난 상상력과 다양한 형식, 개성 있는 스타일을 보여준 이상철 감독의 ‘그녀에게’와 이미랑 감독의 ‘딸에 대하여’, 박흥준 감독의 ‘해야 할 일’, 장만민 감독의 ‘은빛살구’ 등 9편의 작품이 선정됐다.
흥미로운 도전과 실험적 시도가 인상적인 손현록 감독의 ‘그 여름날의 거짓말’, 김태양 감독의 ‘미망’, 이종수 감독의 ‘부모 바보’, 최승우 감독의 ‘지난여름’도 창 섹션에서 상영된다. 이와 함께 작년에 공개된 신작 다큐멘터리 중 가장 큰 호평을 받은 박수남·박마의 두 모녀 감독의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다큐멘터리로는 유일하게 창 섹션에 이름을 올렸다.
덕유산 숲 속 극장에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담겨 있는 3편의 음악영화가 상영된다. 세계적인 클래식 스타가 된 천재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크레센도(2023)’, 세계 최고의 재즈 플레이어를 꿈꾸는 3명의 젊은 연주자가 결성한 JASS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2023)’, 아름다운 선율로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준 사카모토 류이치의 임종 전 마지막 연주를 담은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2023)’가 연속 상영된다.
◇토킹 시네마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
올해 산골영화제에선 영화 전문가를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토킹 시네마(Talking Cinema)’가 진행된다. 변영주 영화감독과 배순탁 음악작가 등 10여 명의 영화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영화 제작은 물론, 음식과 음악 등 영화와 밀접한 주제에 관해 특별한 이야기를 나눈다. 산골영화제 관계자는 “유쾌함과 진지함을 함께 갖춘 새로운 영화 토크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영화와 영화 산업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김이석 동의대 교수 등 전문가들이 무주산골영화제의 지난 11년을 평가하고 앞으로 성장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배우 고민시의 애장품과 기록물, 스페셜 화보 등을 만날 수 있는 특별 전시도 마련됐다.
무주 등나무운동장에선 매일 라이브 공연이 펼쳐진다. 개성 있는 음색이 돋보이는 이무진을 비롯해 담백한 가사와 멜로디로 대중을 사로잡은 10CM, 실력파 가수 카더가든 등이 출연한다.
무주군은 올해 영화제 입장권과 교통, 숙박을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KTX 교통 패키지’와 ‘무주덕유산리조트 숙박 패키지’도 만들었다. 무주군 관계자는 “무주산골영화제 관객들이 무주를 보다 편리하게 여행하고 효율적으로 영화제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체류형 패키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며 “레츠코레일 홈페이지 또는 코레일 톡, 무주산골영화제 홈페이지 등에서 예매가 가능하다”고 했다.
무주군은 올해도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 먹을거리 부스 8곳을 엄선했다. 간단한 주전부리부터 식사, 안주, 디저트까지 다양한 메뉴를 준비했고 가격도 최고 1만원을 넘지 않게 했다. 다회용기를 사용해 일회용품도 줄일 계획이다. 황인홍 무주군수는 “작년에 산골영화제를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로 만들었는데, 이제는 전국에서 열리는 모든 축제가 무주 산골영화제를 모방해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를 만들어 가고 있다”며 “올해도 바가지요금을 근절하기 위해 축제장의 간식 부스를 직접 관리하고 음식 가격도 통제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