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문화를 매개로 소도시를 되살리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영국 정부는 4년에 한 번 도시 한 곳을 선정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문화도시(City of Culture)’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프로젝트 기간은 1년. 문화 기획 전문가들은 주민 아이디어를 모아 365일 내내 도시 곳곳에서 전시, 공연, 축제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연다. 아티스트들과 협력해 지역을 상징하는 예술품을 설치하기도 한다.

서울 중구 주한영국문화원에서 한·영 문화도시 교류를 위해 방한한 문화 기획자 3인을 만났다. 마틴 그린, 엠마 베벌리, 샤나즈 굴자르는 각각 헐, 리즈, 브래드포드의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이들은 “단발성으로 끝날 수 있는 프로젝트의 효과를 확산하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기업가와 지역 주민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영국 문화도시 프로그램을 기획한 (왼쪽부터)샤나즈 굴자르, 마틴 그린, 엠마 베벌리. 이들은 "문화도시 프로그램이 끝나고도지역의 변화가 유지되려면 기업과 주민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종연 더버터 객원기자

-문화도시 프로젝트로 도시는 어떻게 변했나.

그린=헐은 2017년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니 벌써 7년이 지났다. 지금도 헐에서는 야간 축제, 해양 문화유산 체험 프로그램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고 있다. 헐 소재 기업 활동도 여전히 활발하다. 프로젝트 이전을 생각하면 매우 큰 변화다. 헐은 한때 런던과 리퍼풀에 이은 3대 항구도시였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엔 ‘상처 입은 도시’라고 불렸다. 독일 나치군의 집중 폭격을 받고 폐허가 됐기 때문이다. 피해 규모가 런던 다음으로 컸다. 1970년대 들어서는 주력 산업이던 어업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도시가 점점 더 침체됐다. 2017년 문화도시 프로젝트를 하면서 비로소 분위기가 반전됐다. 도심 퀸빅토리아 광장에 헐에서 생산하는 풍력 발전용 터빈을 본뜬 가로 75m의 조형물이 들어섰다. 광장은 늘 이 조형물을 관람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1년 내내 2800개 넘는 전시와 공연, 퍼레이드도 열었다. 그해 헐을 방문한 관광객만 530만명에 달했다.

-공연, 전시 같은 문화행사만으로 경제가 살아날 수 있나.

그린=기업가 정신이 발휘돼야 도시가 더 빠르게 발전한다. 헐에 관광객들이 늘었을 때 가장 먼저 반응한 건 기업가들이었다. 레스토랑, 카페를 열고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 하기 위해 나섰다. 문화도시 사업 이후 투자된 민간자금 규모는 1억7400파운드(약 1700억원)로 추산된다. 문화도시 프로젝트의 효과를 확산하려면 크고 작은 기업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굴자르=브래드포드도 내년 문화도시 프로젝트에서 대기업, 영세기업이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브래드포드에서는 임직원 자원봉사를 활성화할 예정이다. 직원들이 직접 도시재생을 위한 활동을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지역과 기업이 서로를 위해 어떤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을지 깊이 있게 고민할 수 있다.

베벌리=리즈의 경우에도 기업의 미션과 문화도시 프로젝트의 목표를 맞춰가며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기업은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한 좋은 파트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베벌리=리즈는 섬유산업이 발달한 도시다. 럭셔리 브랜드 버버리의 사무소와 공장이 리즈에 있다. 2022년 버버리와 파트너십을 맺고 분기마다 미팅을 했다. 모든 과정을 리즈 현지 디자이너, 리즈 예술대학교 학생들과 함께했다. 버버리는 리즈의 33개 와드(wards·우리나라 행정단위로 군에 해당)를 상징하는 직물을 직접 생산하고, 이 원단을 이용한 의상 컬렉션을 따로 만들었다. 기업과 주민이 함께 지역 고유의 콘텐츠를 만든 것이다. 버버리에게도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고 홍보 효과도 크게 얻을 수 있었다.

-주민의 참여가 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베벌리=문화도시의 지속가능성은 특정 주체가 만들 수없다. 주민들이 얻은 기억과 추억, 교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리즈에서는 공식적인 문화도시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도 주민들이 1년간의 유산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마이 리즈 2023′ 프로젝트를 했다. 각 와드의 대표 33명을 모집해 18개월 동안 문화 이벤트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역량 개발 교육을 받도록 했다. 지난해 8월 31일부터 10월 14일까지 세계 음악·음식 페스티벌, 힙합 콘서트, 도자기 체험 행사 등 문화 행사를 직접 열었다. 각 와드에서 1~3개 이벤트를 열었는데 총 3만1280명이 행사에 참가했다. 3900명까지 참가한 와드도 있었다. 이 33명의 대표는 앞으로도 각 와드에서 문화 행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문화도시 유산이 지속되는 것이다.

-인구도 늘어날까.

그린=누구나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 한다. 학생은 문화 인프라와 콘텐츠가 풍부한 도시에서 공부하길 원하고, 투자자와 기업가도 문화 자원을 바탕으로 활력이 넘치는 도시를 선호한다. 문화는 지역 재생의 핵심이 될 수 있다.

굴자르=지역 청년들이 더 많은 경험을 위해 대도시로 이주하는 건 생각보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이런 인재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 법한 환경을 만들면 된다. 기업과 주민이 함께 이런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