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델마 경마장.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경주마는 은색의 ‘닉스고(Knicks Go)’였다. 세계 최고의 경주마를 가리는 ‘브리더스컵 클래식’ 경주에서 단 한 번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2000m를 질주한 닉스고는 ‘한국마사회’ 소속 경주마. 전 세계 경마인의 꿈의 무대이자, 경마 올림픽으로 불리는 대회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 경주마’가 정상을 차지한 것이다.
◇”세계 챔피언 ‘닉스고’ 같은 정상급 ‘K-경주마’ 생산”
국내 말산업을 이끄는 공기업 한국마사회(마사회)는 닉스고가 지난해 미국에서 씨수말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19일 밝혔다. ‘씨수말’은 품종 개량이나 번식을 위해 기르는 종자(種子)가 좋은 수말. 회당 교배료는 상위 3% 수준인 3만달러(4000만원)로 책정됐다. 닉스고는 첫해 151두와 교배해 약 40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닉스고는 씨수말로 능력을 입증하고 나서 3년 뒤 한국으로 들어올 예정이다.
마사회는 닉스고의 ‘후예’를 K-경주마로 육성할 방침이다. 마사회는 올해 미국 현지에서 한국 생산농가 10개소를 대상으로 닉스고 무상 교배를 지원했다. 지원 사업에 참여한 국산 농가의 씨암말(씨를 받으려 기르는 암말)은 올해 닉스고의 자마(새끼말)를 잉태한 상태로 한국으로 들어온다. 지원 사업에 참가한 김상욱씨는 제주도에서 내년 첫 번째 국내산 닉스고 자마를 얻는다. 그는 “닉스고의 자손이 세계 최고 무대에서 활약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15년 전, 마사회는 서울대학교와 ‘케이닉스(K-Nicks)’ 사업에 착수했다. 말의 유전자(DNA) 정보를 기반으로 유전 능력을 평가해 성장 잠재력이 큰 경주마를 조기에 선발하는 사업에 나선 것이다. ‘K’는 한국(Korea)을, ‘닉스(Nicks)’는 혈통에 따른 경주마 교배 이론을 뜻한다. 유전·육종 이론에 근거한 경주마 선발 기술로 우수한 국산마를 찾거나 생산하고 ‘말’이라는 새로운 수출 활로를 개척하는 게 목표였다.
마사회는 유전 능력을 분석하고 말을 선발하는 기술을 활용해 2017년 미국 킨랜드 경매에서 ‘닉스고’라는 경주마를 확보했다. 당시 8만7000달러(1억원)를 투자했다. 2017년 당시 경주마 평균 경매가(약 13만달러)보다 저렴했다. 유전 능력 분석 기술은 적중했다. 한국마사회 소속이 된 닉스고는 2018년부터 세계 유수의 경주 대회를 휩쓸면서 케이닉스 기술의 과학적 우수성을 입증한 것이다.
이진우 한국마사회 해외종축개발부장은 “케이닉스 사업의 고도화를 통해 닉스고를 닮은 여러 경주마를 발굴해 국산 경주마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며 “우수한 씨수말을 국내에서도 확보한다면 ‘한국의 말산업’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K-경마’, 세계 23개국 수출… 30년 만에 국산마 88% 비중
국내 유일의 말산업 육성 전담 기관인 마사회는 1991년 경주마 자급률 75%를 목표로 제주도에서 국산 경주마 생산에 나섰다. 10년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현재 서울과 부산·경남 경마장 챔피언 자리엔 모두 국산마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제주와 내륙의 165개 농가는 연간 1300마리 이상의 경주마를 생산한다. 지난 5년간 새롭게 경마장에 등장한 경주마의 88%는 국산마가 차지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경주마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던 마사회는 국산 경주마 생산 착수 30년 만에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마시스템’을 갖췄다. 1942년 설립된 한국마사회는 1922년 창설된 ‘사단법인 조선경마 구락부(俱樂部)’가 모태(母胎)다.
K-경마는 현재 세계 23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마사회는 2013년 싱가포르를 대상으로 경주 실황 수출 시범사업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23개국으로 판로를 확장했다. 지난해 경우 실시간 경주 실황을 23개국에 수출하면서 관련 매출만 1204억원을 올렸다. 정기환 한국마사회 회장은 “경마 후진국이었던 한국의 경마는 이제 베트남, 카자흐스탄 등 경마를 도입하려는 후발국의 벤치마킹(모방·응용) 대상이 됐다”며 “‘K-경주마’와 ‘K-경마 콘텐츠’가 수출 효자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