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서 많은 영감이 시작된다는 우리의 모토는 글쓰기가 창의력, 상상력, 다양한 감정을 전달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제가 보기에, 스마트폰 없이는 단 하루도 살지 못할 것 같은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글쓰기는 특히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펜을 잡고 손으로 무언가 쓰기로 결심했을 때, 대부분의 경우, 가장 중요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약서의 서명이 될 수도 있고, 형식화해야 할 아이디어일 수 있고, 연애편지일 수도 있죠! 전시장을 방문하면 전시장 입구부터 글쓰기의 모든 것을 마주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 5월 독일 함부르크에 문을 연 ‘몽블랑 하우스(Montblanc Haus)’에서 기자와 단독으로 만난 니콜라 바레츠키 몽블랑 CEO는 “글쓰기는 사람의 발자취를 담는다”면서 “글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는 인간 고유의 유구한 문화유산을 기념하기 위해, 또 이를 전달하는 수단 중 하나인 몽블랑 펜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몽블랑 하우스를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몽블랑 하우스는 116년 역사의 브랜드를 대표하는 마이스터스튁을 비롯하여 여러 필기구를 제작하는 매뉴팩처와 몽블랑 본사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3600㎡(약 1089평) 면적의 3층 건물로, 스페인의 유명 건축 사무소 니에토 소베하노 아키텍토스(Nieto Sobejano Architectos)가 몽블랑의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브랜드의 컬러인 블랙과 흰색을 조합해 설계했다. 밤이면 마치 ‘만년설’이 뒤덮고있는 알프스 산맥 몽블랑 정상을 등반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각 층마다 몽블랑 필기구에 대한 다양한 모습과 제작 과정, 역사가 담겨 있는데 특히 3층에선 ‘깜짝’ 소식도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가 볼테르(1694~1778)가 1770년 쓴 친필을 시작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버트 아인슈타인, 프리다 칼로, 비틀스,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등 30여명의 전 세계 유명인들의 자필이 빼곡히 몽블랑 하우스에 박물관처럼 보관돼 있었다.
그 중에 한글이 눈에 띄니, 바로 ‘단색화’의 대가 박서보 화백이 아내 윤명숙 작가에게 보낸 엽서였다. 박서보 화백이 아내 윤명숙 여사에게 1961년 파리에서 보냈던 엽서와 60년 뒤인 2021년 서울에서 보낸 엽서가 나란히 전시돼 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꾹꾹 눌러쓴 손편지가 전하는 강한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의 안부는 곧 연서(戀書)였다.
평소 몽블랑 펜을 쓰는 박서보 화백의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된 몽블랑 본사 측에서 단번에 반해 이번 몽블랑 하우스에 친필 보관을 의뢰하게 됐다고. 세월이 닿아 곱게 색이 물든 피부와 작품에 혼을 쏟는 동안 솟은 핏줄이 몽블랑 산맥의 지지 않는 열정을 보는 듯했고, 박 화백의 손끝에서 말쑥한 몽블랑 펜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세대를 잇는 또 다른 인연의 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다시 한번 반했다고 한다.
바레츠키 사장은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박서보 화백이 아내에게 보낸 엽서에서 처럼 글쓰기는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고, 누군가에게 외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며 실존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양한 문화의 여러 글자를 전시함으로써 다양성을 표방하고 싶었다”면서 “동시에 미국과 유럽, 한국 등 동양 예술가의 그림이나 음악 다양한 작품 뿐만 아니라 글씨를 통해서도 예술성이란 공통 분모를 발견하고, 전 세계 방문객들이 많은 영감을 받길 바란다”고 말했다.
몽블랑 하우스는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닌다. ‘몽블랑’이란 브랜드 이름 탄생 경위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유럽의 정점(몽블랑 산)과 글쓰기의 정점을 잇는다는 목표를 같이한다는 데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몽블랑 하우스 전시관에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사인하는 사진마다 몽블랑 펜이 등장하는 걸 보면 몽블랑이 목표했던 성공이 ‘정상’을 밟고 있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와 버락 오바마,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의 사진과 그들의 사인 장면, 사인 등을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미디어 아트와 설치 미술 작품도 볼 수 있다. 파리의 마리안 구엘리 스튜디오의 경우, 종이는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며 창작의 시그니처 재료로 사용되는데 그 중 한 작품이 몽블랑 하우스의 돔 안쪽에 16m높이 위에 설치돼 있다. 마치 샹들리에처럼 같기도, 풍경 같기도, 날아다니는 조형물 같기도 하다. 또 몽블랑 펜이 제조되는 12가지 주요 단계도 자세히 설명돼 있다. 형상화, 절단, 연마 등 여러 단계를 거친다. 보는 것에 이어 몽블랑 필기구를 테스트해 볼 수도 있고, 자신의 생각이 담긴 엽서를 세계 어디에나 보낼 수 있다.
몽블랑 하우스에서 눈에 띄었던 건 30인의 유명 인사들 친필 끝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꼬마 아이의 글자가 담겨 있는 것. 알고 보니 몽블랑 직원 중 한 명의 아들이 일하고 돌아온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은 것이라 했다. 여기서 바레츠키 CEO의 바람을 읽을 수 있었다.
“종이 한 장에서 시작하는 마법이에요! 아무 것도 없던 것에서 점이 선이 되고 원이 색을 입으면서 그것이 책이, 그림이, 건물이 되곤 하죠.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결혼 서약서가 될 수도 있고, 그 결실로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죠! 한국은 교육열이 매우 높아 글쓰기와 읽기에 관심이 투철하지만, 전 세계엔 아직도 문맹률이 높은 나라도 있어요. 저희의 사명은 여기에 더해 취약 계층 아이들에게 다양한 글쓰기를 가르치는 겁니다.” 몽블랑 하우스엔 ‘라이팅 아뜰리에(Writing Atelier)’가 있어 방문객들에게 캘리그래피 아트, 창의적인 글쓰기, 어린이 교실 등과 같은 걸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또 불우한 아동과 청소년을 위해 글쓰기를 유익하게 사용하고 창의적으로 표현하도록 영감을 주는 특별 수업을 개최한다고 덧붙였다.
“많은 분들이 함부르크와서 이 아름다운 장소를 보고 느끼고, 새로운 생각의 창을 넓히길 바랍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곳에 올 수는 없겠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동 가능한 집(예를 들면 팝업 아틀리에)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 중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글쓰기에 영감을 받는다면 제2 , 제 3의 비틀스와 볼테르, 라거펠트와 박서보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함부르크(독일)=최보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