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가을바람과 햇살에 들판의 곡식들이 익어간다.
도시에서 자라 농사지어본 경험이 없어도 알알이 여물어 고개 숙인 벼들을 보면 까닭 없이 든든하고 푸근해지는 것은 우리가 천생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게 서러운 날, 그 마음을 보듬어주시던 어머니 사랑이 가득 담긴 밥 한 그릇. 그 따뜻했던 쌀밥의 추억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직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여러 먹거리 중 특히 쌀을 낭비하면 어른들께 그렇게까지 혼났던 이유도 쌀밥은 그 옛날 ‘가장 귀했고, 가장 먹이고 싶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가득 차려졌다 하더라도 한국인 식탁의 주연이자 소울 푸드(soul food)인 흰쌀밥이 빠지면, 그것은 미완의 상차림이 된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쌀밥을 지어 먹었을까? 시간을 거슬러 부족국가(部族國家) 시대로 올라가면 황금 들녘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벼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 시대에 이르러 제철(製鐵) 기술이 발달하면서 농기구가 보급되고 벼 생산 능력도 높아진다. 지금과 같은 밥은 쇠로 솥을 만들면서 지어먹은 듯하다. ‘삼국사기’에 보면 1세기 초 고구려 제3대 왕인 대무신왕(大武神王) 때 ‘솥에 밥을 짓는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후 쇠솥이 점차 보급되면서 취반(炊飯) 법도 한반도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취(炊)’란 밥(飯) 짓는 것으로, 쌀을 씻어 솥에 안치고 적당하게 물을 부은 후 열을 가해 끓이고, 뜸 들이고, 알맞게 태워 누룽지까지 만드는 세 단계를 거친다.
밥은 우리 민족에게 ‘주식(主食)’으로 자리 잡으면서 생명의 원천이 되고 ‘밥상 공동체’까지 형성하며 그 얼을 이어가고 있다.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 하지만 쌀이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차지고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탱글탱글하거나, 고슬고슬한 식감을 찾는 이들도 많다. ‘가치 소비’가 일상이 된 현대인은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후 자신의 입맛에 맞는 품종의 쌀을 찾아 결제한다. 최근 트렌드는 우리 땅에서 자라고 수확한 ‘신토불이(身土不二)’이면서 뛰어난 맛을 자랑하는 ‘고품질’ 쌀이다. 최저가가 아닌, 취향에 맞는 맛과 향의 쌀로 가족과 함께 근사한 한 끼를 즐기는 것이다.
◇품종·농사환경·재배방법 삼박자가 만든 ‘고품질 쌀’
‘K라이스(Rice)’가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다. 농림축산식품부(이하 농식품부)는 2012년부터 ‘종자(種子) 주권’ 강화에 나섰고, 민·관 협력으로 결실을 거두어가고 있다. 최근 각 지자체에서는 ‘쌀 품종 국산화’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많은 지역에서 국산 품종을 재배하고 있지만, 그동안 고품질 쌀은 ‘외래 품종’의 장벽이 높았다. 이에 정부는 미질(米質)이 뛰어난 국산 품종을 다수 개발했고, 지자체별로 국산 품종 재배 면적을 넓혀가고 있다. 이를 통해 늦게 여무는 추청(秋晴·일본 품종)은 국산 품종인 ‘참드림’ ‘알찬미’ ‘삼광’으로, 다소 일찍 여무는 고시히카리(koshihikari·일본 품종)는 ‘해들’ 등으로 대체되고 있다. 국산 품종 벼는 병충해에 강하고 잘 쓰러지지 않아 재배하기 쉬우며 수확량도 좋다. 매년 실시하는 식미(食米) 평가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품종만이 밥맛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품종종자 ▲농사환경 ▲벼 재배방법이 모두 제대로 맞물려야 맛있는 쌀이 된다. ‘고품질 쌀’은 이 삼박자와 더불어 각 지역 브랜드 특색까지 잘 반영돼 탄생한다.
이런 노력 끝에 개발·생산된 쌀은 고유의 식감과 풍미를 지니게 된다. 쌀을 선택하기 전에 생산지와 브랜드뿐 아니라 개인의 입맛과 취향에 맞는 품종인지 꼼꼼하게 살펴봐야 하는 이유이다.
◇내 입맛엔 어떤 쌀? ‘식감·찰기·향·메뉴’ 따라 고르는 국산 쌀 품종
농촌진흥청에서 추진하고 있는 ‘수요자 참여형 품종 개발’은 농업인과 소비자 평가단이 우수한 품종의 벼를 선별해 ‘지역 품종’으로 결정하는 사업이다. 충청남도 아산시는 올해 ‘수요자 참여형 품종 개발’로 선정된 고품질 벼 ‘해맑은’의 재배 단지를 156ha(47만1900평) 조성했다. ‘해맑은’은 2019년 농촌진흥청이 아산시·농협과 공동으로 개발한 품종이다. 병충해와 태풍에 강하며 밥맛이 뛰어나 생산 농가와 소비자 모두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17년 ‘최고 품질 쌀’로 선정된 ‘해들’은 쌀알이 맑고 깨끗하며 밥맛도 좋아 인기가 높다. 강원도 홍천 오대산의 이름을 딴 ‘오대’는 특유의 고슬고슬한 식감으로 밥을 오래 보관해도 변화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고슬고슬한 식감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맞는 최적의 품종이다.
이 외에도 지역별 국산 고급 품종 쌀이 소비자를 사로잡고 있다. 충청지역의 대표 품종은 ‘삼광’이다. ‘삼광’은 신동진에 이어 두 번째로 널리 재배되는 품종으로, 단백질 함량이 낮아 부드럽고 차진 식감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쌀알의 표면적이 큰 편이라서 다른 재료의 맛이 잘 스며들 수 있는 덮밥이나 비빔밥에 적합하다. 경기 ‘참드림’은 ‘참되고 차진 밥맛을 드린다’는 의미로, 토종을 교배해 개발된 신품종이다. 유럽에도 수출할 만큼 향미가 뛰어나 고정 소비층이 두텁다. 각종 병충해에 강해 친환경 재배에 적합하다. 고시히카리 대체용으로 확대 보급돼 국내 품종 재배율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식에 가장 잘어울리는 밥맛이어서 가정식 백반이나 한정식에 추천한다.
넓은 평야가 펼쳐진 호남은 전국에서 쌀 생산량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꼽힌다. 전남은 기존 ‘새누리’와 ‘청무’의 장점만 취해 교배한 ‘새청무’가 주력이다. 키가 작고 줄기가 단단해 비바람에 강하며 병충해에도 저항성이 뛰어나다. 찰기와 부드러운 식감이 잘 어우러져 다양한 요리에 두루 활용할 수 있다. 전북 ‘신동진’은 전국에서 재배 면적이 가장 넓은 품종이다. 쌀알이 굵고 수분기가 낮아 꼬들꼬들한 식감을 지녔다. 차지지 않고 입자가 살아있어 볶음밥·김밥에 잘 어울린다.
경북 ‘일품’은 ‘신동진’과 반대로 둥글고 짧은 쌀알에 단맛이 밀도 있게 담겨있다. 차진 맛이 뛰어나 고두밥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제격이며, 찌개류나 전골 등 각종 국물 요리에 적셔가면서 먹기에 좋다. 경남에서는 2019년 대한민국 우수품종상을 수상한 ‘영호진미’가 유명하다. 단맛과 함께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일품이며, 밥으로 지었을 때 윤기가 많이 돈다. 쌀의 외형이 잘 유지되고 뜸을 들일 때 온도 변화에 민감한 돌솥 밥이나 냄비 밥 등에 좋다.
팔방米인 우리 쌀, 저탄소 재배 기술로 ‘그린 컨슈머’까지 사로잡다
기후와 환경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며, 기업들은 ESG(친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몰두하고 있다. ‘친환경’에 관심을 쏟는 ‘그린 컨슈머’를 사로잡기 위해서이다. 이에 농식품부·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이하 농정원)도 그린뉴딜 및 2050 탄소 중립 대응에 앞장서기 위해 올해부터 ‘저탄소 재배 쌀’ 시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저탄소 재배 쌀’ 시범 사업에 힘찬 첫발을 내디딘 만큼, 하반기에는 소비를 촉진하고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적극적인 홍보에 나설 계획이다. 농식품부·농정원은 11월 농업인의 날을 기점으로 ‘온라인 판매전’에서 저탄소 재배 쌀을 구입하면 할인쿠폰까지 지원하는 프로모션도 진행한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소비자들의 다양한 입맛과 취향에 부응하는 한편, 더 높은 생산성과 브랜드 차별화를 위해 국산 쌀 신품종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며 “기후 위기까지 고려하여 지속 가능한 영농환경을 만들고 탄소 중립에 농업 분야가 일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공동기획 : 농식품부·농정원·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