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기초 종목인 육상에서 불모지나 다름없지만, 남자 마라톤만큼은 국제 무대에서 이름을 떨쳤다. 고(故) 손기정 옹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제패한 이후 서윤복(1947년)·함기용(1950년) 선생이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이어 황영조(1992 바르셀로나올림픽 금)와 이봉주(1996 애틀랜타올림픽 은, 2001년 보스턴마라톤 우승)가 철각 계보를 이었다.

◇거꾸로 가는 마라톤 시계

그러나 20년 가까이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자 마라톤 한국 기록은 2시간7분20초. 2000년 이봉주가 도쿄국제마라톤에서 세웠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선수들 기록은 오히려 퇴보했다. 현재는 '2시간10분'기록도 희귀하다. 2012년부터 올해까지 2시간10분 이내 기록자는 단 한 명. 지난해 10월 경주국제마라톤에서 케냐 귀화 선수인 오주한(32·청양군청)이 2시간8분42초로 준우승했다.

올림픽에 나갈 실력도 안 된다. 도쿄올림픽 남자 기준 기록은 2시간11분30초인데, 오주한만 이 기록을 충족시킨다. 한때 우리에 뒤처졌던 일본은 오사코 스구루(29)가 지난 3월 도쿄국제대회에서 세운 2시간5분29초가 최고 기록이다. 2019년부터 현재까지 2시간10분대 안으로 진입한 선수만 53명이다. 2시간6분대 선수도 두 명이다.

◇실업팀 느는데, 기록은 퇴보?

국내 마라톤 실업팀은 지난해 기준으로 42개. 2000년 23개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같은 기간 소속 선수도 남녀 43명에서 108명으로 2.5배 정도 증가했다.

달리기가 직업인 사람은 많아졌는데 기록은 왜 좋아지지 않을까. 건국대 유영훈 감독은 "선수들이 전국체전에서 좋은 성적만 올려도 쉽게 선수 생활을 이어 갈 수 있어 기록 단축을 위해 힘들게 훈련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전국체전 메달권 선수의 연봉은 약 7000만~8000만원. 대기업 뺨친다. 한 실업팀 코치는 "국내 육상팀의 80%에 이르는 시군도청팀이 전국체전, 도민체전에서 점수 비율이 높은 마라톤에 가장 신경을 쓴다"며 "그러다 보니 전성기를 훌쩍 지난 선수도 '새 직장' 구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했다.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지영준(39·은퇴) 코오롱 코치는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마라톤에선 경쟁자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국내 마라톤에선 과거 황영조와 이봉주 같은 경쟁 구도가 사라진 지 오래"라고 말했다.

◇유망주 키울 시스템 마련해야

실업팀은 많은데 꿈나무를 위한 무대는 줄어든다. 최근 몇 년 새 어린 선수들을 위한 등용문인 '역전 마라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1955년 시작된 '한반도 통일 대역전경주(옛 경부역전마라톤)'는 2016년 막을 내렸다. 현재 코오롱 구간마라톤이 국내 유일의 중·고교 구간 마라톤대회로 남아 있다. 중·고 대회가 적어지고, 학교 지원도 줄어들어 춘천 소양고나 인천 재능고 같은 육상 명문 팀이 최근 잇달아 해체됐다.

대한육상연맹 홍보이사를 맡은 이봉주는 "국내 선수들이 전국체전 성적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에 도전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어린 유망주들이 마음 놓고 훈련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