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승리한 뒤 기쁨에 겨워 껴안은 롯데 배터리. 주형광은 당시 연장 11회말 세 명의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포수는 고(故) 임수혁.

롯데 자이언츠의 올드 팬이라면 1984년과 1992년 만큼이나 1999년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1999년의 단 한 경기를 꼽자면 백이면 백, 삼성과 맞붙은 플레이오프 7차전을 꼽을 것이다.

1999년 10월 20일 대구시민운동장. 롯데와 삼성이 운명의 플레이오프 7차전을 벌였다. 시리즈 전적 3승3패로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롯데 선발은 문동환, 삼성 선발은 노장진이었다.

4회 이승엽과 김기태가 홈런 하나씩을 쏘아 올리며 삼성이 2-0으로 앞섰다. 그리고 6회초 희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솔로 추격포를 터뜨린 롯데 펠릭스 호세가 3루를 돌 때 페트병 하나가 관중석에서 날아들었다.

다행히 호세 옆에 떨어진 페트병. 심기가 불편해진 호세는 꾹 참고 홈을 밟았다. 그런데 이번엔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던 그에게 달걀이 날아왔다.

주요 부위에 달걀을 맞은 호세는 분노하며 헬멧을 관중석으로 던지려고 시늉했다. 그러자 일부 홈 관중들이 오물과 페트병, 컵라면을 투척하면서 경기장은 엉망이 됐다. 더는 참지 못한 호세가 더그아웃에서 뛰쳐나와 관중석으로 방망이를 던졌다. 호세에겐 퇴장 명령이 내려졌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플레이오프 당시 분노한 호세가 방망이를 관중석으로 날리는 장면.

당시 롯데 주장 박정태는 대구 관중의 난동에 화가 난 나머지 배트 케이스로 더그아웃 유리창을 모두 깬 뒤 가방을 메고 경기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 많은 선수들이 짐을 싸서 박정태의 뒤를 따랐다. 롯데 구단 직원들이 달려가 박정태를 뜯어말렸지만 박정태의 분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이를 극구 말린 이가 당시 롯데 사령탑 김명성 감독이었다. 김명성 감독은 선수들에게 “경기를 포기하면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또다시 관중 폭력 사태가 발생한다면 심판에게 몰수게임을 강력하게 요청하겠다”고 설득했다. 박정태를 비롯한 선수들은 겨우 진정하고 더그아웃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일부 삼성 팬들의 쓰레기 투척은 계속됐고, 롯데 선수들은 철망을 사이에 두고 관중과 싸움이 붙었다. 결국 심판이 구장 내 방송을 통해 “이렇게 쓰레기를 던지며 경기를 방해하면 홈팀 삼성이 몰수패를 당한다”고 발표하면서 사태는 진정되었다. 박정태는 선수들을 모아놓고 “오늘 무조건 이기라. 안 그라모 다 디진다. 알긋나!”라며 필승의 의지를 다졌다.

폭풍 같았던 23분이 흐르고 다음 타석에 롯데 마해영이 들어섰다. 그는 2-2 동점을 만드는 솔로포를 쏘아 올렸다. 마해영은 홈을 밟은 뒤 헬멧을 내동댕이쳤다.

그는 이후 인터뷰에서 “홈런을 치고 호세처럼 방망이를 던지고 퇴장을 당할까도 생각했는데 내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아 그 생각은 접었다”고 말했다. 당시 홈런을 때린 다음 대구 관중들을 화난 표정으로 노려봤던 마해영은 삼성으로 이적한 뒤 2002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현재 한화의 감독대행인 LG 최원호를 상대로 우승을 결정하는 역전 끝내기 홈런을 치며 대구를 열광에 빠뜨렸다. 소속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프로다.

삼성 이승엽은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홈런 두 방을 날리며 이름값을 했다.

다시 7회초. 롯데는 김응국의 안타로 3―2 역전에 성공했다. 삼성도 가만있지 않았다. 8회말 김종훈과 이승엽의 백투백 홈런으로 다시 5―3 리드를 잡았다. 이승엽이 공을 치고 두 팔을 힘차게 뻗는 순간 한국시리즈행의 주인공은 삼성으로 결정된 것 같았다. 당시 23세였던 이승엽은 그해 정규리그에서 54개의 아치를 그린 홈런왕이었다.

하지만 롯데엔 운명의 9회초가 있었다. 공필성이 안타를 치고 나간 뒤 1사 상황에서 임수혁이 대타로 나왔다. 임수혁은 임창용이 바깥쪽으로 던진 공을 밀어쳐 극적인 동점 투런 홈런을 뽑아냈다(임수혁은 6개월 후인 2000년 4월 경기 도중 부정맥으로 쓰러졌고, 오랜 투병 생활 끝에 2010년 2월 세상을 떠났다).

5-5로 맞이한 연장전. 11회초 롯데가 구위가 떨어진 임창용을 두들겼다. 1사 2루 상황에서 김민재가 중전 안타를 때렸다. 2루 주자 임재철이 홈으로 들어오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지만, 중계 플레이에 나선 김한수가 공을 더듬으며 롯데가 6-5 역전에 성공했다.

11회말 롯데 마운드엔 에이스 주형광이 있었다. 그는 연속 3삼진을 잡으며 이 치열했던 승부를 마무리 지었다. 주형광이 마지막 타자인 정회열을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무릎을 꿇은 채 두 팔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은 아직도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승리를 확정하고 두 팔을 들고 기뻐하는 주형광.

플레이오프에서 모든 힘을 쏟아버렸을까. 롯데는 한화와의 한국시리즈에선 1승4패로 밀리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1999년은 한화의 유일한 우승 시즌이다.

하지만 그해 ‘가을 야구’에서 보여준 롯데 선수들의 투혼과 근성은 부산 야구 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았다. 포기하지 않고 승리를 위해 끝까지 달려드는 모습에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롯데 팬들은 1999년을 그 어느 해보다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

얘기가 길었다. 갑자기 1999년의 추억을 꺼내놓은 이유는 7월 24일, 오늘이 당시 롯데 사령탑을 맡았던 고(故) 김명성 감독의 19주기가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일부 대구 홈 관중의 난동에 경기를 포기하려 했던 선수들을 설득해 결국 한국시리즈까지 이끈 덕장은 2001년 7월 24일 휴식일에 지인을 만나고 오는 도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급하게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성적에 따른 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꼽혔다.

2001시즌 김명성 감독은 4강권으로 예상되던 팀 성적이 주전들의 부상 등으로 바닥에서 맴돌자 코치들에게 “어떻게 팀을 꾸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할 만큼 고민이 컸다고 한다. 당시 롯데 관계자는 “후반기 들어서 팀이 2연패를 당한 게 김 감독의 심적 부담을 가중시켰을 것”이라고 전했다.

올해 7월 24일은 고(故) 김명성 감독이 세상을 뜬지 19년이 되는 날이다. 인자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던 김명성 감독은 롯데를 마지막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킨 사령탑으로 남아있다.

프로야구 현역 감독의 갑작스러운 별세에 야구계가 큰 충격에 빠졌다. 김명성 감독은 한국 야구계에 보기 드문 덕장이었다. 매일 거친 승부의 세계에서 살면서도 서예와 다도를 취미로 즐겼다. 심정수가 롯데 투수의 공에 맞아 크게 얼굴을 다쳤을 때는 직접 병실을 찾아 위로와 사과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김명성 감독이 작고했을 때 당시 강상수 투수 코치가 남긴 글이 있다.

‘이제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자하신 감독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어야 합니까? 경기에 질 때도 혼자 속으로 삭이시던 감독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속병이 깊으신지도 모르고 꼴찌 탈출과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애쓰셨던 감독님을 생각할 때 저희들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감독님, 어서 돌아오십시오. 감독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던 야구를 사직구장에서 다시 저희들과 함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장을 갑자기 잃은 롯데는 좌초하고 말았다. 그해 최하위를 기록한 롯데는 4년 연속 8위를 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8·8·8·8·5·7·7이라는 최악의 암흑기를 겪었다.

김명성 감독이 유명을 달리한 지도 이제 19년이 지났다. 과거는 미화되는 법이라지만 그래도 그 뜨거웠던 시간을 그리워하는 롯데 팬들이 많다. 롯데는 김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1999년 이후로는 아직까지 한 번도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지 못했다.

롯데의 올 시즌 성적은 30승33패로 8위다. 지난 시즌 꼴찌를 한 것을 생각하면 나아졌다고도 볼 수 있지만 겨우내 전력을 보강한 연봉 1위 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적이다. 개막 후 5연승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상승세를 탈 만하면 느슨한 경기 운영으로 어이없이 승리를 내주는 경우가 많았다.

롯데 팬들은 무엇보다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전력을 다해 잡고, 지고 있는 경기도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따라붙는 그런 자이언츠가 보고 싶다. 매 순간이 승부처 같았던 1999년 가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