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다. 수많은 집념어린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쟁점을 놓고 격론과 공방이 오간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주인공인 한·일 양국뿐 아니라 심판 격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가 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본격화된 ‘독도 문제’의 역사와 현황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매주 일요일 연재한다. /편집자

1962년부터 1964년까지 한국과 일본은 한일회담에서 독도 문제에 관해 ‘제3국 조정안’과 ‘국제사법재판소(ICJ) 회부’를 놓고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다. 일본은 미국 등 제3국이나 조정기관이 일정 기간 해결하지 못하면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자는 것이었고, 한국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1961년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일본인이 임명돼 한국에게 불리할 뿐 아니라 국제사법재판에 회부되면 한국이 독도에 설치한 각종 시설과 경비인력을 철수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독도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두고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일본의 파상 공세에도 한국의 버티기가 계속되자 일본 내의 분위기는 1964년 들어 강경해졌다. 일본 국회는 “다케시마[독도] 문제에 관해 분명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한 한일회담을 타결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시이나 에츠사부로 외상 역시 “일본은 다케시마 문제의 확실한 전망이 없으면 회담을 종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사토 에이사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한일회담의 결과로 체결되는 협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독도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면 회담의 타결이 어려울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1964년 봄 한국에서 대학생들과 야당 세력의 강력한 반대 투쟁으로 중단됐던 제6차 한일회담은 그해 12월 제7차 한일회담으로 속개됐다. 그리고 1965년 2월 기본조약이 가조인되는 등 급물살을 탔다. 대일(對日)청구권, 재일(在日)한국인의 법적 지위, 약탈 문화재의 반환, 어업 문제 등 한일회담 의제들에 대해 대략적인 합의가 이뤄진 1965년 4월 사토 일본 총리는 이동원 한국 외무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한일 간에 남아 있는 현안은 독도 문제뿐이고, 국교 정상화 전에 이 문제도 해결 방향을 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1965년 6월 17일 한국 측의 김동조 주일대사와 연하구 외무부 아주국장, 일본 측의 우시바 노부히코 외무성 심의관과 우시로구 토라오 아시아국장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일본이 내놓은 ‘분쟁 해결에 관한 의정서’는 “독도 문제를 포함한 양국 간 모든 분쟁은 먼저 외교적으로 해결하고 안 되면 중재위원회에 맡겨 그 결정에 따른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은 ‘독도’를 포함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일본은 다음날인 6월 18일 독도 문구를 삭제한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을 다시 제시했다. 한국은 같은 날 독도 문제를 제외하고, 법적 구속력을 명시하지 않은 채 양국 정부의 합의를 전제로 제3국의 조정에 맡기는 방안을 내놓았다.

일본은 ‘독도’라는 표현은 문안에서 뺐지만 사실상 내용에 포함됐다는 입장이었다. 시이나 외상은 “일본 측으로서는 독도 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문제를 일괄 타결한다는 지상명령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이동원 외무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은 독도 문제를 한일회담 의제에 포함시키지 말도록 지시했고, 이 건은 한국 정부의 안정과 운명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인만큼 만일 한국이 수락할 수 있는 해결책이 없다면 한일회담을 중지해도 좋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응수했다.

6월 21일 밤, 한국은 “양국 간에 일어나는 분쟁은 조정에 의해 해결한다”는 내용을 수정 제의했다. ‘일어나는’이란 문구로 이미 한·일 간 갈등이 드러난 독도 문제를 제외하고, 해결방법은 강제성이 없는 조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일어나는’이란 구절을 삭제한 ‘양국 간 분쟁’이란 표현을 주장했고, 해결방법은 ‘조정 또는 중재’로 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6월 22일 발표된 최종 문안은 한국과 일본이 각각 하나씩 양보하여 “양국 간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기로 하며,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에 의해 해결을 도모하기로 한다”였다.

이 같은 합의는 시간에 쫓긴 한국과 일본이 외교적으로 절충한 것으로 각각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겼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가능성은 협정문에 서명한 그 순간부터 현실화됐다. 김동조 주일대사가 그날 외무부에 보낸 긴급전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이상과 같이 양해사항을 한 것은 독도란 문구 삭제를 통해 일본이 요구했던 절차상 합의에 대한 시간적 구속, 법적 구속, 결정에 대한 복종 의무 등을 완전히 해소시킨 것임. 따라서 아국(我國)의 합의가 없는 한 중재 수속은 물론 조정 수속도 밟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독도 문제의 해결은 실질적으로 아측(我側)의 합의 없이는 영원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게 되는 것임.

반면 시이나 일본 외상은 1965년 10월 29일 일본 국회에서 답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쟁처리에 관한 교환공문’에 있어 다케시마는 이 분쟁에서 제외됐다고 명기되지 않기에 당연히 양국의 분쟁 대상이 됩니다. 조정에 맡긴다고 말한 이상, 어떠한 조정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조약 위반입니다. 따라서 일한(日韓) 조약이 효력을 발생하면 적당한 기회에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양국 간에 절충을 하고자 합니다.

독도 문제는 한일회담의 의제가 아니며 장기적으로 논의하자는 한국 정부와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 문제를 갖고 가려는 일본 정부가 팽팽하게 대립하던 상황이 막판에 갑자기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으로 수렴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궁금증이 제기돼 왔다. 이른바 ‘독도 밀약설’은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1965년 1월 한국과 일본 정부가 맺었다는 ‘독도 밀약’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진 정일권 국무총리(왼쪽)와 고노 이치로 자민당 부총재.

일본 정치경제 전문가인 노 대니얼은 『월간중앙』 2007년 4월호에 실린 「한일협정 5개월 전 ‘독도 밀약’ 있었다」라는 글에서 1965년 1월 한국의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의 고노 이치로 자민당 부총재가 “독도 문제는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일 기본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맺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11년 같은 내용을 담은 『독도밀약』(한울아카데미)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글에 따르면 한일회담이 독도 문제 등으로 벽에 부딪치자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권력 핵심과 직접 통하는 밀사를 보내기로 했다. 한일회담의 실무를 담당하던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김동조 주일대사를 제쳐놓고 막후 협상의 주역으로 발탁된 사람은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의 친형인 김종락이었다. 당시 한일은행 전무였던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5·16쿠데타를 지원하여 정권 실세들과 가까웠으며 일본에서 자라고 일본인 부인과 결혼해서 일본 사정에도 밝았다.

한일회담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6·3사태의 여파로 회담이 한동안 중단됐던 1964년 11월 일본에 특파된 김종락은 자민당의 실세 가운데 한 명인 고노 이치로를 만나 한일회담의 막후 조정에 나설 것을 설득했다. 망설이던 고노는 거듭되는 김종락의 설득에 마침내 이 제의를 받아들였고, 사토 총리에게 이를 보고하여 승인을 받았다. 김종락은 한일회담의 최대 걸림돌로 부상한 독도 문제에 대해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일단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1965년 1월 12일 일본에서 고노 이치로를 대신하여 날아온 우노 소스케 의원이 서울 성북동에 있는 범양상선 회장 박건석의 집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나 ‘독도(다케시마)에 관한 비밀협정’에 서명했다. 그 내용은 앞서 언급한 대원칙 아래 ▲독도(다케시마)는 앞으로 한·일 양국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고, 동시에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하는 경우 양국이 독도(다케시마)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현재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을 하지 않는다.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나간다는 4개 항으로 돼 있었다.

한·일 양국이 맺었다는 ‘독도 밀약’을 입증할 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정일권과 고노가 서명한 문서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보관하고 있던 김종락은 1980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집권한 다음 김종필 등을 부패세력으로 몰아 숙청할 때 관련 문서를 불태웠다고 했다. 일본 측에서 ‘독도 밀약’ 문서를 넘겨받았던 고노 이치로 자민당 부총재는 반년 뒤인 1965년 7월 8일 갑자기 사망했고 그 후 문서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독도 밀약’과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의 관련 여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한일회담에 참여했던 한국의 외교관들은 ‘독도 밀약’을 알지 못했고, 회담에 관련된 외교문서에는 이러한 밀약의 존재를 의심할만한 부분은 없다. 하지만 한일회담을 연구한 최희식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최고 지도자들이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애매한 타결’ ‘잠정적 타결’을 추구하여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정치적 결단이 존재했으며, 이러한 정치적 배경 아래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 교섭을 시작했으리라는 분석은 충분한 개연성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