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직후 극단적 선택을 한 것과 관련, 여권(與圈) 인사들의 '선택적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 박 시장을 추모·애도하는 목소리는 곳곳에서 쏟아졌지만 성추행 피해를 호소한 전직 비서와 관련해선 언급을 피하는 모습이다. 진보 진영이 강조해왔던 성인지(性認知) 감수성, 피해자 중심주의는 이번 사건에서 실종됐다.
민주당은 12일에도 박 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사실에 대해선 언급을 피했다. 장례위 공동집행위원장인 민주당 박홍근 의원은 "가짜 뉴스와 추측성 보도는 고인과 유가족은 물론 피해 호소인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고 했다.
민주당 내 여성계 출신 인사들도 침묵하는 분위기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출신인 민주당 남인순 의원은 10일 새벽 박 시장 빈소가 차려지기 전부터 장례식장을 지켰지만 성추행과 관련한 말은 하지 않았다.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출신인 정춘숙 의원은 페이스북에 "박원순 시장님, 내 선배님, 명복을 빕니다"라고만 썼다. 다른 전·현직 여성 의원들도 "인터뷰하고 싶지 않다"(백혜련 의원), "고인의 명예를 존중해 드리는 게 도리"(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라며 성추행 의혹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오히려 여권이 도 넘은 '박원순 옹호'를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친여(親與)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엔 "난중일기에 '관노(官奴)와 수차례 잠자리에 들었다'는 구절 때문에 이순신이 존경받지 말아야 할 인물이냐"라는 글이 올라왔다. 친여 성향 역사학자 전우용씨는 "나머지 모든 여성이 그만한 '남자 사람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여권은 그동안 보수 진영에서 성추문 사건이 벌어졌을 땐 매섭게 질책했다. 민주당은 2006년 한나라당 최연희 전 사무총장의 '여기자 성추행' 논란, 2012년 새누리당 김형태 후보의 제수 성추행 의혹 때 "의원직 사퇴" "제명" 등을 요구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민주당 최민희 전 의원은 2006년 당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회원들과 함께 '최연희 사퇴' 집회를 벌이기도 했다. 최 전 의원은 이번 박 시장 사건과 관련해선 "지금은 애도할 시간"이라며 조문을 거부하는 정의당 의원들을 공개 비판했다.
민주당은 2018년 검찰 내부 폭로로 '미투' 운동이 촉발됐을 때 '피해자 중심주의'를 외치며 지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2018년 3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올해 4월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 자기 당 소속 인사들의 미투 의혹이 불거졌을 때에는 침묵했다. '성추행'을 대하는 태도가 진영에 따라 180도 달라진 것이다.
청각장애학생 성폭행 사건을 다룬 소설 '도가니' 저자인 공지영씨는 11일 트위터에 서울시 온라인 분향소 링크를 공유하며 "바보 박원순"이라며 "잘 가요. 주님께서 그대의 인생 전체를 보시고 얼마나 애썼는지 헤아리시며 너그러이 안아주실 테니"라고 했다. 공씨는 박 시장 조문을 하지 않겠다고 한 정의당 의원들을 향해 '어디서 그렇게 못된 거만 쳐배워서' '뭔 놈의 대단한 정의 나셨어'라고 한 다른 트위터 글을 리트윗했다.
반면 과거 잇단 성추문으로 '성(性)누리당' 같은 비판을 받았던 야권은 이번 사태에서 "2차 가해를 막아야 한다"며 피해자 보호 및 진상 규명에 앞장서는 모습이다. 미래통합당 김은혜 대변인은 "신상 털기에 확인 안 된 사진 유포까지, 2차 가해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고 했다.
여권 인사의 성 비위 의혹에 대해 '지각 성명'을 내면서 '선택적 분노' 논란을 낳았던 여성단체들은 이번엔 "성추문 의혹의 진실이 묻혀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피해자의 말을 가로막는 사회에서 진보는 불가능하다"며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왜곡, 2차 가해를 멈추어야 한다"고 했다. 2030 여성들의 분노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여기자협회는 성명에서 "피해 호소인 보호가 우선"이라며 "의혹을 제대로 밝히는 게 첫 단계"라고 했다.
반면 여성가족부는 12일 "성명을 낼 계획이 현재로선 없다"고 했다. 여가부 관계자는 "박 시장 장례가 끝나는 대로 (성추문 의혹 관련) 성명을 낼지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검찰 내부 폭로로 국내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도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