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안병현

"나, 엔니오 모리꼬네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항상 내 곁에 있는,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친구에게 이를 알립니다."

지난 6일 세상을 떠난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92)는 자신의 부고를 미리 써뒀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나 평생 이탈리아에서 산 모리꼬네에게 한국은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영화·드라마 500여 편의 음악을 작곡했고, 전 세계 앨범 판매량은 7000만장. 이 중 200만장이 한국에서 팔렸다. 박찬욱 감독은 "그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은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그의 음악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문명사회에 없다"고 했다.

모리꼬네는 음악을 "삶이란 감옥에 갇혀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건네는 위로주 한잔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 달콤하고도 따뜻했던 위로주를 사랑한 신도(信徒) 열 명(가나다순)이 내 인생의 모리꼬네 OST를 '아무튼, 주말'에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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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게음악의 神이었다
미션(The Mission·1986·롤랑 조페)

김동조(트레이더·49)

세상은 모순 투성이다. 영화 ‘미션’에서는 죄가 많을수록 회개와 반성을 하지 않는다. 스페인에게 영토를 넘겨받은 포르투갈은 과라니족과 예수회 신부들을 학살한다. 권력자들은 죄를 지었지만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죄를 지었다는 것도 모른다. 자신들을 잡아서 팔아넘긴 노예 상인을 용서를 것도 피해자인 과라니족이다. 일급 용병이자 노예 상인인 멘도자는 이런 세상을 잘 알고 있었다. 동생을 죽이기 전까지는. 애인을 빼앗긴 질투와 분노로 동생을 죽인 후 멘도자는 무너져내린다. 멘도자는 칼과 갑옷들을 매단 채 이과수 폭포를 기어올라 과라니족에게 용서를 구한다. 자신을 용서한 과라니족을 구하기 위해서 죽음을 감수하고 다시 칼을 드는 것은 멘도자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영화 '미션'

이 모순 투성이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은 모두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때문이다.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문제다. 눈물의 문제인 것이다. '음악의 신'이 내게 알려준 깨달음이다.

빵집에 울려퍼진 휘파람
석양의 무법자
(For A Few Dollars More·1965·세르조 레오네)

김연수(소설가·50)

고향집 제과점 전축 옆에는 영화 주제곡을 모은 음반들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제과점에서 데이트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음반은 그들의 밀어를 위한 사운드트랙이었다. 그들을 위해서는 ‘쉘부르의 우산’이나 ‘남과 여’ 같은 영화음악이 어울렸다.

하지만 손님이 없을 때 내가 트는 건 다른 음반이었다. 서부영화의 주제곡을 모은 레코드였다. 그때는 왜 그렇게 전쟁이니 결투니 하는 것들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어른들이 들려주는 전쟁의 기억은 영화보다 생생했는데. 어쩌면 그 영화들은 전쟁 트라우마를 치유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석양의 무법자'

서부영화 주제곡을 담은 레코드를 전축에 올리면 빵집에 휘파람 소리가 울려퍼졌다. ‘석양의 무법자'의 주제곡을 나는 제일 좋아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아.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게 분할 뿐. 때로 오글거리는 내 진지함에도 사운드트랙이 있다면, 그건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 될 것이다.

전축도, LP도… 한 시대가 끝났다
시실리안(The Sicilian Clan·1969·앙리 베르누이)

모그(영화음악 감독·48)

중학생 때 ‘시실리안’에서 처음 알랭 들롱을 봤다. 서른 즈음, 지인 집에 갔다가 알랭 들롱 영화의 음악을 모은 LP에서 이 영화 주제가를 발견했다. 그 집에 놀러 갈 때마다 틀어달라고 졸랐다. 피아노의 단음 하나 갖고 시작한 음악은 누아르 영화 한 편을 장악했다. 영화의 다른 부분은 기술적 성취가 높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그만큼 음악 역할이 컸다. 지금이랑은 달랐다.

영화 '시실리안'

나중에 이 음악을 CD로도 들어봤지만, LP가 주는 풍미를 느낄 순 없었다. 모리꼬네의 시대는 영화음악의 시대이자 전축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젠 CD도 아니고 유튜브에서 음악을 찾아 듣는다. 모리꼬네가 죽었다니, 한 시대가 끝난 게 분명하다.

서러울 땐 팬 플루트를
말레나(Malena·2000·주세페 토르나토레)

밀라논나(패션 유튜버·68)

“많은 여자들에게 그 이름을 기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끝까지 내 기억에 남은 것은 말레나 뿐이었다.” 막 청년이 된 레나토의 독백과 함께 영화의 마지막 음악이 흘러 나온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주제곡이 떠올랐다. 모리꼬네가 지나가버린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할 때, 악기로는 ‘팬 플루트’를 쓴다는 걸 그 때 눈치챘다. 2차대전 지중해의 어느 도시,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말레나’를 남성들은 욕망의 눈으로, 여성들은 ‘창녀같다’며 쳐다봤다. 그 때 말레나는 늘 눈을 내리깔고 걸었다. 그녀가 고개를 세우고 길을 걷게 된 건, 사람들의 바램이나 저주처럼 창녀가 된 후였다. 삶의 모순. 주인공 모니카 벨루치의 눈빛은 영화 촬영지 시라쿠사(Siracusa)의 맑은 태양빛을 받아 더 강렬해보였다.

영화 '말레나'

지난해 11월에도 다녀온 시라쿠사는 이탈리아 남단 시실리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다. 쇠락해도 아름다운 건축물, 가족애가 방패도 되고 창도 되는 땅이다. 삶은 늘 가혹했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에 말레나가 몇번 미소지었길 바래본다.

손가락 총구를 향해 훅, 불었다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1964·세르조 레오네)

박서보(화가·89)

단역 배우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것은 영화 ‘황야의 무법자’였다. 이 젊은 배우의 무뚝뚝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는 그가 물고 있던 굵은 시가를 힘껏 빨며 생기는 눈가의 주름처럼 관객들 머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하지만 극장을 나서서도 반복적으로 내게 소환되었던 것은 빠르게 뽑아 여러 명의 상대를 쓰러뜨리는 그의 총 솜씨가 아니라, 총성이 멈추고 흐르는 청명한 휘파람 소리였다.  마침 그날은 임신한 아내와 둘째 아들의 손을 잡고 나선 모처럼의 시내 나들이였다.

영화 '황야의 무법자'

5살이 된 어린 아들이 2시간이나 되는 영화를 꼼짝도 하지 않고 집중해 보는 것도 신기했는데, 그 휘파람 소리가 녀석의 작은 입술에 신들리듯 들러붙어서는 쉬익쉬익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는데도 그 리듬만큼은 비교적 정확히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라디오에서 영화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후다닥 내 옷장을 열어 오래된 나의 중절모를 삐딱하게 걸쳐 쓰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가락 총구를 향해 훅 바람 부는 흉내를 내는 것이다. 제풀에 지칠 때까지 서너 달은 지속했고, 그 사이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장난감 권총과 벨트를 사줬다. 연기력에 변화는 없었으나 담요를 들고 와 판초로 뒤집어쓰는 등 소품 응용력만큼은 창조적으로 키워가는 것 같았다. 후일 이 작은 녀석이 디자인전공의 대학교수가 되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게 다 휘파람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 휘파람이 석양 아래 낮게 깔려 흐르는  영화 ‘황야의 무법자’의 주제곡을 작곡한 엔니오 모리꼬네가 엊그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보석처럼 빛나는 많은 영화음악으로 관객의 심금을 울렸지만, 내게 기억되는 모리꼬네는 시네마 천국의 모리꼬네도, 이스트우드의 시가를 떠올리는 모리꼬네도 아닌, 5살 꼬맹이의 불꽃 연기에 불을 붙이던 휘파람 소리의 작곡가 모리꼬네가 있을 뿐이다.

모리꼬네는 왠지’ 황야의 무법자’에서 주인공 이스트우드가 내뱉은 말 “쇼는 다 끝났소.”라는 대사를 읊으며 눈을 감았을 것 같아 그의 죽음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그는 나보다 세 살이 많다. 그의 석양이 졌다. 내게도 석양은 깊게 드리워져 있고.

처음엔 재수 없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베스트 오퍼(The Best Offer·2013·주세페 토르나토레)

박정민(배우·33)

학창시절. 같은 반 친구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조금 부잣집 친구였고, 조금 허세를 부리던 친구였다.(조금 재수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뭘 듣고 있느냐고 물었고, 무슨무슨 모리꼬네라고 했다. 프랑스 여가수 음악도 듣냐며 비아냥거리곤 자리로 돌아간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무슨무슨 모리꼬네도 조금 재수없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다.

누구나 그런 영화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보지 않았다고 하면 미개인 취급을 받을 것만 같은 영화. 영화과에 들어갈 때까지 내게는 그런 영화가 ‘시네마 천국’이었고, 그 영화에 대해서 아는 건 그 유명한 OST 뿐이었다. 난 도저히 미개인이고싶지 않아 남몰래 ‘시네마 천국’을 보기에 이르렀고 그 유명한 OST가 왜 좋은 음악인지 알게 됐으며, 그 음악을 그 옛날무슨무슨 모리꼬네가 만들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화 '베스트 오퍼'

엔니오 모리꼬네. 프랑스 여가수가 아닌, 이야기꾼으로서의 음악감독. 배우의 감정과 호흡하고, 카메라와 함께 흐르고, 그자체로 이야기가 되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 현재의 영화인들에게 넘치는 영감이 되어주시던 분이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셨다. 그는 영화인들의 영화인이었고, 잃어버린 꿈을 심어주던 분이었다. ‘시네마 천국’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과 협업한 작품 중 하나인 ‘베스트 오퍼’는 “모든 가품에는 진품의 미덕이 숨어있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해보고 싶다. 지금그리고 앞으로의 영화에는 모리꼬네의 미덕이 숨어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베스트 오퍼’(최고 경매가)로 남아있을 것이다.

서부 사막 한복판으로 순간 이동
석양에 돌아오다(The Good, The Bad And The Ugly·1966·세르조 레오네)

박칼린(뮤지컬 음악 감독·53)

초등학교 때 이 영화를 봤다. 당시 미국 서부에 살고 있었는데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죄다 휘파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영화 '석양에 돌아오다'

모리꼬네의 음악은 그림이나 다름없다. 눈을 감고 그의 음악만 들어도 영화 장면이 절로 떠오른다. 오케스트라에서 쓰지 않는 도구, 사람 목소리, 휘파람 등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동원한 그의 음악은 감정을 순식간에 사로잡고 스토리텔링까지 해준다. 그것은 배우의 대사나 감독의 연출로 이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지금도 이 영화음악에서 나오는 채찍 소리, 휘파람 소리를 들으면 그 순간만큼은 서부의 사막 한복판에 가 있는 느낌이 든다.

취향을 만들어준 첫사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1984·세르조 레오네)

박훈정(영화감독·45)

초등학교 때 ‘주말의 명화’에서 졸지도 않고 끝까지 다 본 작품이다. 음악부터 미장센(화면 구성), 연기 등이 다 좋았다.  대공황과 금주법 시대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을 정도였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이 영화에서 좋아하는 음악으로 어린 제니퍼 코널리가 발레를 할 때 나온 ‘데버라의 테마’를 꼽는 사람이 많을 테지만, 나에겐 누들스(로버트 드니로)가 친구들이 묻힌 묘지 문을 열고 들어갈 때 흘러 나오던 음악이 기억에 남는다.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팬 플루트로 연주하는 곡이어서 어딘가 쓸쓸하고 처연했다. 배우의 표정과 음악이 어우러지면서 추억과 회한을 동시에 표현하는 그 장면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내게 취향이란 걸 만들어준 첫 번째 영화다.

알프레도 할아버지가 필요할 때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1988)

안철수(국민의당 대표·58)

단국대 의대에서 학생들 가르치면서 새벽에 일어나서 v3를 만들었던, 가장 바쁘고 열심히 살 때였다. 그때 유일한 위안은 아주 가끔 보는 영화였다. 요즘처럼 영화를 DVD나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때가 아니어서, 영화 보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영화 '시네마 천국'

그때 ‘시네마 천국’을 유독 많이 봤다. 알프레도 할아버지가 검열당한 키스 장면을 모아놓은 필름을 훗날 영화감독이 된 토토가 보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이 영화를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리꼬네의 음악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 장면에 나오는 음악은 나를 보듬어준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알프레도 할아버지 같은 친구가 필요할 때마다 이 음악을 떠올린다.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칠 때면
러브어페어(Love Affair·1994·글렌 고든 카슨)

조영수(작곡가·44)

막 대학생이 됐을 때, 누나가 빌려 온 비디오로 이 영화를 처음 봤다. 연인 사이의 잔잔한 감정을 표현한 영화 자체도 좋았고, 애넷 베닝도 예뻤지만, 영화가 끝나고선 OST부터 찾아 들었을 정도로 모리꼬네의 음악이 강렬했다.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쳐야 할 자리가 생기면, 베닝이 허밍하며 들었던 피아노 솔로를 자주 연주했다.

영화 '러브어페어'

이 영화를 봤을 때부터였을까. 모리꼬네처럼 음악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완벽한 영화음악 작곡가가 되고 싶다. 대중가요를 만들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건 뒷전에 미루게 된다. 히트 공식이나 트렌드를 따지지 않고, 영화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음악, 내가 잘할 수 있는 음악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