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7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충남 서산 SK이노베이션 공장에서 만났다. 정 부회장으로서는 지난 5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삼성SDI 천안공장에서 만나고, 지난달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LG화학 오창공장에서 만난 뒤 이뤄진 마지막 '배터리 회동'이다.
현대차는 글로벌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한국 배터리 3사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해 전기차 기술 및 가격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함으로써 내년부터 본격화될 '차세대 전기차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전기차 시장을 먼저 개척해 전 세계의 환호를 받고 있는 테슬라, 대대적인 전기차 전환을 선언한 폴크스바겐·GM 등이 글로벌 합종연횡으로 참전 채비를 하고 있어 향후 치열한 경쟁이 전개될 전망이다.
◇SK이노, 현대차 최대 고객사 노려
이날 현대차 경영진은 기아 니로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 셀 공장과 SK그룹이 개발 중인 차세대 배터리, 전기차 주요 부품 개발 현황을 둘러봤다. SK그룹은 음극재를 흑연이 아닌 금속으로 바꿔 에너지 밀도를 높인 리튬-메탈 배터리, 최소 전력으로 배터리 구동 시간을 늘려주는 전력 반도체, 배터리팩 무게를 줄여주는 차세대 경량 소재 등을 소개했다. 정의선 부회장은 "미래 배터리 개발 방향성을 논의한 매우 의미있는 자리였다"며 "현대차는 인류를 위한 혁신을 위해 세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들과 협업을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은 이날 "현대·기아차가 글로벌 시장에서 선도적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만큼 이번 협력으로 양 그룹은 물론 한국 경제에도 새로운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은 현대차그룹이 내년 최초로 출시하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 기반의 차세대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 5년치 공급 계약을 지난해 말 따냈다. 중형 CUV(크로스오버유틸리티차량) NE를 비롯해, 제네시스 G80 기반의 전기차, 제네시스 도심형 준준형 전기차 JW, 기아 차세대 전기 세단 CV 등 모든 전기차 신차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그동안 현대 전기차(코나 EV·아이오닉 EV)와 하이브리드차에 LG화학 배터리를 탑재하며 오랜 기간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다. SK이노베이션은 기아 전기차(니로EV·쏘울EV)에 공급해 물량은 많았지만, '오랜 친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SK이노베이션은 약 10조원으로 추정되는 차세대 전기차 물량을 대거 확보하면서 현대차그룹의 '메인 배터리사' 지위를 노리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의 기술력이 뒤지지 않는 상황에서 가격 메리트가 있었다"고 말했다. LG화학은 현대차가 2022년 출시할 전기차 일부 물량을 확보한 가운데 연내 진행될 추가 입찰에서 SK이노베이션과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결국 현대차가 '첫 배터리 합작 공장'을 누구와 할 것이냐에 따라 순위가 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SDI는 지난 5월 현대차를 초청해 차세대 전지인 전고체(全固體) 배터리 등 미래 배터리 기술 동향을 소개했지만, 당분간 현대차에 공급할 가능성은 작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현대차는 일반적으로 전기차에 많이 쓰이는 파우치형 배터리를 쓰는데, 삼성SDI는 원통형 배터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차에 배터리를 맞추지, 배터리에 차를 맞추지는 않는다"며 "미래 배터리 협업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당분간 공급은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글로벌 전기차 경쟁 이제 시작
현대차는 기술력이 뛰어난 배터리 3사의 경쟁을 유도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글로벌 전기차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테슬라를 비롯한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합종연횡으로 차세대 배터리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절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중국 배터리 업체인 CATL의 부상이 예사롭지 않다.
테슬라는 미국에서는 파나소닉, 중국에선 LG화학과 CATL로부터 배터리를 공급받고 있다. 그런데 최근 테슬라가 미래 배터리인 '100만 마일 배터리'(반영구 배터리)를 CATL과 함께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CATL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이 배터리는 100만 마일(약 160만㎞)을 달려도 될 만큼 내구성이 강한 배터리로, 가격도 비싸지 않아 개발에 성공하면 테슬라의 전기차 가격을 휘발유차 수준 이하로 낮출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테슬라가 9월 배터리데이 행사에서 강력한 차세대 배터리 기술을 공개할 가능성이 크다"며 "테슬라가 이 기술을 빠른 시일 내에 상용화할 경우 한국 전기차·배터리 산업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GM도 미국에서 LG화학과 합작공장을 세우고 있지만, 중국에선 CATL과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지난달 밝혔다. 도요타도 일본에선 파나소닉, 중국에선 CATL·BYD와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 같은 이유로 배터리 조사업체 SNE리서치는 올해 1~5월 전기차 배터리 시장 1위는 LG화학이지만, 10년 뒤(2030년)엔 CATL이 1위가 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조재필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는 "한 나라에 글로벌 전기차 4위(현대차)와 톱클래스 배터리 3사를 보유하고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경쟁력"이라며 "배터리 3사가 우리를 추격하고 있는 CATL 등과 기술 격차를 지금처럼 유지하면서 현대차가 전기차 판매를 늘려 '윈윈'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