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참전용사인 찰스 랭글 미국 전 하원의원. 왼쪽은 지난 2013년 랭글 전 의원 방한 당시 찍은 사진이고, 오른쪽은 6·25 전쟁 당시 그의 모습이다.

6·25 참전용사 출신인 찰스 랭글(90) 전 미 연방 하원의원은 1일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전쟁에서 총까지 맞았는데, 그 뒤로 내 인생에서 '나쁜 날(bad day)'이란 건 없었다"며 "6·25가 내 삶의 경로도 근본적으로 바꿔놨다"고 했다. 46년간 하원 의원으로 재직하다 지난 2016년 정계에서 은퇴한 랭글 전 의원은 1950년 스무 살의 나이에 참전해 2년간 복무했다. 현재 생존해있는 미국 출신 참전용사 중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인사다. 그는 "한국은 자유의 상징이고, 왜 민주주의가 공산주의에 승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표본"이라며 "이미 참전용사들에게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보은(報恩)을 다 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군에 입대한 랭글 전 의원은 1950년 7월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탔다. 2사단 503포병대대 소속으로 미 본토에서 파견된 부대 중에선 가장 먼저 한국 땅을 밟았다고 한다. 그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며 "부산으로 가는 배 위에서야 이게 진짜 전쟁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부산에서 북진(北進)하던 랭글 전 의원의 부대는 1950년 11월 평양 대동강 인근 군우리에서 중공군에 포위됐다. 사흘간 발생한 미군 사상자가 5000명이 넘었다. 그는 "죽거나 끌려간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났고, 내가 죽을 만한 모든 이유가 있었다"며 당시의 절박함을 회고했다. 중공군이 쏜 포탄 파편이 등에 맞아 구덩이로 떨어졌지만, 전우 40여 명을 이끌고 산을 기어 넘어 극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꼬박 3일 밤낮을 헤매다 극적으로 구출됐다. 랭글 전 의원은 "영웅적 행동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행동이었고, 그저 살아 나오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중공군이 소리지르며 돌격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전율이 일 정도로 악몽 같은 기억"이라고 했다.

양구군 능선 전투 때 포격 모습 - 6·25 전쟁 특별기획전에서 강원 양구군 능선 전투 당시 모습. 찰스 랭글 전 미국 하원 의원은 미 포병 소속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입었다.

랭글 전 의원은 "총에 맞은 다음 하나님께 내 목숨을 살려주면 절대로 어떤 일에도 불평하지 않겠다고 빌었다"며 "살아남았으니 그 뒤로 내 인생에서 '나쁜 날'이란 건 없었다"고 했다. 그는 "6·25 전쟁이 내 인생 경로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며 "전쟁이란 비극이 재발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때부터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뉴욕의 빈민가 할렘 출신인 그는 군 제대 후 보훈부 장학금을 받아 로스쿨에 진학했다. 1971년에는 뉴욕에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뒤 내리 23선(選)을 했다. 2003년 미 의회에 결성된 지한파(知韓派) 의원 모임인 '코리아 코커스' 초대 의장을 맡았고, 위안부 결의안과 6·25 전쟁 추모의 벽 건립안을 주도하는 등 워싱턴에서 친한파(親韓派) 역할을 해왔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은 그를 "한국인의 영원한 친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랭글 전 의원은 "한반도 평화를 불러와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북한을 향해선 "생존하는 데 핵무기가 왜 필요하냐"고 비판했다. 이어 "북한은 중국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며 "유엔(UN)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제재의 뒷구멍으로 (중국의) 경제적 지원이 이루어지는 걸 막는 데 강경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랭글 전 의원은 "한국은 단순히 미국의 동맹을 넘어 동아시아의 앵커(anchor) 국가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됐다"며 "내 마지막 소원은 죽기 전에 한반도 통일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공동 기획 :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