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섯 살 주부 프로기사 이민진이 또 한 번 '불꽃 투혼'을 펼치고 있다. 여자바둑리그(여바리) 출전자 32명 중 최고령 2위인 그는 22일 현재 3승 2패로 다승 공동 5위, 팀(삼척 해상 케이블카) 내 1위를 질주 중이다.

"올해 리그 출전을 놓고 많이 고민했었어요. 육아와 가사(家事)에 전념하는 게 옳은 건지 답이 안 나와서…. 새해 초 가족 여행을 하며 바둑을 한 달가량 멀리해 봤는데, 30년을 걸어온 정든 길을 도저히 떠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만 36세 주부 기사 이민진. 그는 십수년 후배들 틈에서 여자바둑리그 상위권 성적을 올리고 있는 비결을 "가족의 힘"이라고 했다.

이민진은 투혼의 승부사로 유명하다. 2007년 국가대항 여자단체전인 정관장배에 최종 주자로 출전, 기적적인 5연승으로 한국의 역전 우승을 일궈낸 신화의 주인공이다. 결혼 이듬해인 2013년엔 만삭의 몸으로 삼성화재배 월드마스터스 여자부 통합예선을 뚫어 뉴스를 탔었다.

"문제는 상하이서 열리는 본선(本選)이었어요. 한국기원에 알리면 만류할 게 뻔해 몰래 항공권을 구입하고 비자까지 받아 놓았었죠. 그런데 분만 예정 사흘 전인 출국 전날 양수가 터져 못 갔어요. 분만실 TV로 대회 현장의 텅 빈 내 자리를 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그렇게 태어난 소하율(7)양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율이 출생 후의 하루하루는 '전쟁'이었다. 젖먹이 때는 말할 것도 없었고, 좀 큰 뒤엔 유치원 데려다 주고 운동 좀 하다보면 반나절이 지나갔다. 오후 대국 마치면 복기(復棋)할 틈도 없이 다시 유치원으로 달려갔다. "집(분당)과 한국기원(홍익동)이 왕복 3시간 거리여서…. 귀가 후 집안일 마무리하고 애 재우고 나면 바둑 공부는 꿈도 못 꿨죠."

그의 연도별 승률표를 보면 2009년 이후 2015년까지 50% 안팎을 유지하다 2016년부터 3년간 30%대로 뚝 떨어진다. 그러다 지난해 40%(10승 15패)에 복귀했고, 올 들어 44.4%(4승 5패)를 기록 중이다.

"젊은 후배들은 매일 10여 시간씩 공부하는데 저는 1~2시간 내기도 힘들었죠. 안 되겠다 싶어 작년엔 국가대표를 지원, 반년간 지냈는데 시간적으로 너무 힘들더군요." 그 후부터는 집의 TV 채널을 바둑으로 고정하고 오며 가며 유행 포석을 접했다. 거실과 화장실 벽을 온통 사활 문제로 뒤덮은 것도 틈틈이 수읽기 감각을 유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올해 여바리서 활약 중인 '엄마 기사'는 이민진 외에도 3명 더 있다. 김혜민(34) 9단이 세 살 된 딸을, 김은선(32) 5단이 7세 및 5세 남매를 키운다. 김수진(33) 5단은 4개월 전 딸을 낳았다. "혜민이가 언젠가 '엄마 기사들이 지나치게 저평가받아 속상하다'며 울더라고요. 가슴이 찡했어요."

하지만 이민진에게 가족은 활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남편은 이민진의 대국을 모두 챙겨 보며 전폭적으로 응원한다. 딸 하율이는 올해 부쩍 바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민진은 "부녀(父女)의 진도(進度)가 비슷해 둘이 호적수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보인다"며 설렌 표정이다.

그는 "욕심을 버리니 바둑이 편해지고 주부 역할도 더 즐거워졌다. 그 행복을 놓지 않으려고 열심히 둘 뿐"이라고 했다. 만천하 워킹맘들에게 한마디 해 준다면? "아이한테 가끔 미안한 느낌이 들지만 우리의 삶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저 스스로를 항상 격려하며 살아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