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16일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면서 남북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했지만, 고교 역사 교과서에는 2018년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등 정부의 남북 화해 업적이 들어가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19일 본지가 현행 고교 한국사 검정 교과서 8종을 확인한 결과, 모든 교과서가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 교과서들은 작년 정부 검정을 받아 올해부터 사용되고 있다.

북한이 우리 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을 비하하는 막말을 쏟아내고, 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장면을 뉴스를 통해 알고 있는 고교생들이 남북이 협력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교과서로 수업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 이전에는 역사 교과서의 현대사 부분에 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취임 등만 다뤘지, 업적에 대해서는 거의 싣지 않았지만, 올해부터 사용된 한국사 교과서들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 화해 성과를 큰 비중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희 국립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현재진행형인 정책을 교과서에 집어넣은 것은 애초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진행중인 현대사 무리하게 담아… 학생들 혼란

올 1학기부터 전국 고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한국사 검정(檢定) 교과서 8종은 "문재인 정부의 남북 화해·협력 성과를 소개한 부분이 많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검정을 통과할 당시부터 교단에서는 "어떻게 귀결될지 모를 남북 관계를 성급하게 단정적으로 화해 무드로 표현한 것이 불안하다"는 우려가 나왔다.

◇남북 관계 긍정 서술 일색

출판사 8곳에서 낸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모두 2018년 남북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 등을 남북 화해의 대표적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예컨대 씨마스 출판사의 교과서는 마지막 부분에 '남북 화해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노력'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악수하는 사진을 한 페이지 가득 실었고, "고조되던 한반도의 긴장은 2018년 4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으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고 서술했다. 또 "남북한, 북·미 정상 사이의 회담이 이어지면서 화해와 협력, 조정과 갈등이 공존하는 유동적인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비상교육이 만든 교과서도 현대사 맨 뒷부분에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대화하며 걷는 사진을 크게 실었다.

동아출판사 교과서도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서로 손을 잡고 들어 올리는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사진을 게재하고, '평화로운 한반도가 되면 좋겠다' 등 당시 정상회담 홈페이지에 실린 댓글들을 실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면서 남북 관계가 개선되자 경의선·동해선 철도 연결 재개, 개성공단 재가동 등 경제 협력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고 문재인 정부의 성과를 담았다.

미래엔 교과서도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핵 포기를 종용하면서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한 남북 대화의 의지를 표명하고, 북한도 이에 호응하여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하였다"고 했다.

◇북한도발은 없고, 소득주도성장은 담아

남북 관계에 대해서는 장밋빛 평화를 강조한 반면, 북한 도발은 담지 않거나 축소했다. 예를 들어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가운데 6종이 '천안함 폭침 사건'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았다.

미래엔·지학사·비상교육 등 3종은 아예 천안함 폭침을 담지 않았고 해냄·씨마스·천재교육 등 3종은 '천안함 침몰' 또는 '천안함 사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동아·금성 2곳의 출판사만 북한의 도발을 뜻하는 '피격'이라는 단어를 썼다.

반면 현 정부에서 내세운 '소득 주도 성장'을 담은 교과서도 있다. 씨마스 교과서는 소득 주도 성장에 대해 "가계의 임금과 소득을 늘리면 소비도 늘어나 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정부 업적 담으려면 30년은 지나야"

교사들은 현실과 다른 교과서로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북한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이어 개성공단·금강산·최전방 GP(감시초소)에 군대 재주둔, 서해 NLL(북방한계선) 인근의 포 사격 재개 방침도 발표하고 있는데, 교과서는 이와 동떨어진 남북 관계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온라인 개학 이후 일선 고교에서는 개화기까지 한국사 교과서 진도가 나간 고교가 많다. 서울의 한 고교 역사교사는 "조선왕조에서도 당대 임금의 업적은 실록에 절대 적지 않았는데 이번 교과서가 현 정부 치적을 많이 담은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며 "이를 불쾌해하는 교사들은 이번 정부 서술까지는 일부러 진도를 나가지 않겠다고 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고교 역사교사는 "교과서에 현 정부에 대한 서술이 많다 보니 학생들 사이에서 네 편 내 편이 갈려 문제"라고 했다. 이명희 공주대 교수는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교과서에 담으려면 적어도 30년은 지나야 한다"며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현 정부를 교과서가 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이성호 중앙대 교수는 "역대 어떤 정부도 역사 교과서에 재임 중인 대통령의 중간 성과를 대대적으로 담은 경우는 없었다"며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맞지 않고, 현실을 호도해 교육적으로도 학생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