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6일 개성에 있는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김여정이 "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고 위협한 지 사흘 만이다. 우리 세금 약 180억원으로 지은 건물이 김여정 한마디에 가루가 됐다. 연락사무소 설치는 2018년 남북 정상이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한 것이다. 이번 폭파는 북이 판문점 선언을 파기한다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북을 달랜다며 '전단 금지법' 만들고 탈북민을 수사 의뢰하고,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을 재개한다고 했지만 북은 '그걸로는 어림도 없다'며 걷어찬 것이다.

북의 이런 행동은 계획된 것이다. 북한군은 이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지역 등에 다시 군대를 전진 배치할 것을 예고했다. 대남 삐라(전단) 살포 계획도 밝혔다. 북한군은 "군사 계획을 작성해 당 중앙군사위원회 승인을 받을 것"이라고도 했다. 핵·ICBM 같은 전략 도발이나 우리 영토·영해를 직접 위협하는 수준의 공격이 중앙군사위 승인 사안이다. 연락사무소 폭파를 시작으로 개성공단·금강산·NLL 등을 건드리며 한반도 위기 지수를 끌어올리겠다는 의미다. 미국을 겨냥한 핵·ICBM 카드도 만질 수 있다.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두고 순서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김정은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전쟁을 목적으로 도발하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도발하는 것이다. 이번 도발도 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뒤에 '극적' 타결을 노리는 것이다. 해묵은 '벼랑 끝 전술'이다. 1990년대 초 1차 북핵 위기 때는 전쟁설까지 돌았지만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방북을 이용해 핵 동결만 내주고 식량과 에너지를 챙겼다. 이명박 정부 때는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을 한 뒤 물밑으로는 돈을 챙길 정상회담을 타진했다 한다. 이번에도 최종 목표는 '대북 제재 해제'에 두고 일부러 위기감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역으로 대북 제재 효과가 마침내 제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즘 북한 사정은 김정은이 핵심 계층이 모여 사는 평양의 생활 문제를 논의하는 대책 회의를 가질 정도로 나쁘다고 한다. 2017년 말 북한 수출을 대부분 틀어막은 대북 제재의 효과에다, 코로나 사태로 북·중 국경 봉쇄가 겹치자 북한의 생명 줄인 대(對)중국 교역이 90%까지 줄었다. 이렇게 되면 장마당이 존립하기 어렵다. 북 보유 외화가 머지않아 고갈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도발 시리즈로 상황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뒤 문재인·트럼프에게 '극적 반전'을 타진할 것이다.

민주당 의원이 북한 사정을 경찰 무릎에 목이 눌려 "숨을 쉴 수 없다"고 하던 흑인에 비유했다. 지금 북한 사정이 정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핵무기만 포기하면 제재가 풀리고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다. 대대적 경제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제재는 군사력 사용 없이 김정은을 핵 포기의 길로 몰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앞으로도 북의 발버둥이 계속될 것이다. 한·미가 흔들리지 않으면 사실상 처음으로 북핵 폐기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문제는 한·미 정부다. 문재인 정부는 말은 하지 않지만 이미 북핵 폐기는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던지는 카드에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악재가 쌓이고 있는 트럼프 역시 2년 전 싱가포르와 같은 거짓 쇼 유혹을 느낄 수 있다. 북핵의 최대 피해자인 우리 국민이 눈을 부릅떠야 한다. 지금은 우리 민족의 재앙인 북핵 먹구름을 마침내 걷어낼 수 있느냐, 아니면 또다시 북의 전략에 말려들어 다람쥐 쳇바퀴를 돌릴 것이냐 하는 기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