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브리스톨 시내를 돌아다니는 붉은여우. 도시 여우는 야생 여우보다 주둥이 짧고 뇌 크기가 줄어든 것으로 확인됐다.

“난 너하고 놀 수가 없어.” 여우가 말했다. “난 길들지 않았거든.”

“난 친구들을 찾고 있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길들이다’라는 게 무슨 뜻이니?”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너무나 쉽게 사람들이 무시해버리는 행위지.” 여우가 말했다. “만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 필요해진단 말이야. 넌 나에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테니까.”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는 1943년 발표한 소설 '어린 왕자'에서 친구는 가게에서 이미 만들어진 상태로 구할 수 없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서로 필요한 존재가 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려면 오해의 근원이 될 말도 아끼면서 시간을 두고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세계 각국에서 야생동물들이 텅 빈 도심을 활보하는 모습이 자주 보이고 있다. 극단적 사회적 격리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거리는 더 줄인 것이다. 여우도 마찬가지다.

소설에서 어린 왕자가 여우를 길들여 친구가 됐다면 지금은 여우가 먼저 인간에게 다가와 스스로 길들이고 있다. 심지어 얼굴까지 바꾸면서 말이다. 영국 글래스고대의 케빈 파슨스 교수 연구진은 지난 3일 국제 학술지 ‘영국왕립학회보 B’에 “도시에 사는 붉은 여우는 두개골 형태가 도심 생활에 맞게 야생 여우보다 전반적으로 작아졌으며, 암수 차이도 줄었다”고 밝혔다.

◇다윈 예측대로 길드는 도시 여우

영국에서는 런던 같은 대도시에서도 새벽녘 쓰레기통을 뒤지는 붉은 여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도시에 사는 여우는 지난 25년간 무려 5배로 증가했다. 1990년대 영국 도시에서 3만3000여 마리가 살았다면 지금은 15만 마리 이상이나 된다. 이제 여우는 도시 생활에 적응했는지 사람을 봐도 놀라지 않고 빤히 쳐다본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이를 두고 2만~4만 년 전 회색 늑대가 길들면서 개가 됐듯 야생 여우가 스스로 인간 사회로 들어와 길드는 과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우가 늑대의 길을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은 시베리아에서 진행한 실험에서 이미 가능성이 입증됐다. 구소련 과학자들은 1959년부터 야생 은여우 중 온순한 놈들만 골라 교배했다. 그렇게 8세대가 넘어가자 주둥이가 짧고 귀를 펄럭이며 심지어 개처럼 짖는 여우도 나왔다. 배를 긁어주면 좋아하는 행동도 개와 흡사했다.

이 야생 여우들은 러시아 과학자들의 실험 끝에 유전자까지 바뀌었다. 지난 2018년 미국 일리노이대의 안나 쿠케코바 교수는 시베리아에서 온순한 여우끼리만 교배한 결과 뇌에서 학습과 관련된 유전자가 바뀌었다고 발표했다. 이제 여우가 사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구소련 과학자들이 길들인 은여우. 개처럼 온순하며 짖기도 한다. 학습 관련 유전자가 야생 여우와 달라졌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사람 손을 탄 러시아 은여우와 달리 영국 붉은 여우는 스스로 인간에게 다가왔다. 파슨스 교수 연구진은 국립 스코틀랜드 박물관, 런던 자연사 박물관 등에 보관 중인 여우 두개골 274점을 조사했다. 두개골은 모두 발견 지역이 도시 또는 시골로 표시돼 있었다. 도시는 건물과 가로등이 있고 숲이 없는 곳을, 시골은 숲이 있고 인위적 개발이 덜한 곳으로 규정했다. 즉 시골에서 잡힌 여우는 야생 여우로 볼 수 있다.

두 지역 여우를 비교했더니 서식지가 두개골 형태에 크게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도시 여우는 주둥이가 짧고 넓적해졌다. 뇌 크기도 시골 여우보다 줄었다. 두개골 형태의 암수 차이는 28%나 줄었다. 이는 모두 일찍이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이 야생동물이 길들면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서술했던 것이다.

영국 도시의 쓰레기통 주변에 있는 붉은여우. 쓰레기통을 뒤지기 편하도록 주둥이가 짧아졌다.

◇쓰레기통 뒤지다 주둥이 짧아지고 뇌 작아져 연구진은 시골 여우의 기다란 주둥이는 도시 여우보다 더 빨리 다물 수 있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야생에서는 도망가는 먹잇감을 낚아채기 위해 주둥이를 빨리 닫을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도시 여우의 주둥이는 강하게 깨무는 데 적합한 형태라고 설명했다. 도시에서는 사냥보다는 쓰레기통에서 먹이를 주로 찾는다. 이때는 뭐든지 잘 깨물어 부수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 쓰레기통에 머리를 박고 냄새를 맡을 때도 주둥이가 짧은 편이 낫다고 연구 진은 추정했다.

여우는 회색 늑대가 개로 길드는 과정에서 그랬듯 언젠가부터 음식 찌꺼기를 얻어먹기 위해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을 것이다. 그 순간부터 여우는 다양한 생물학적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번 코로나 사태는 인간 사회에 대한 여우의 마지막 빗장을 여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이제 인간이 어떻게 여우에게 길들지 답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