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6월 4일 홍범도 장군 등이 이끄는 독립군이 북간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일본군 초소를 급습했다. 이를 시작으로 전개된 전투는 사흘 뒤 만주 봉오동 산골짜기에서 독립군이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명을 부상시키는 대승으로 끝났다.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였다.

봉오동 승전 100주년을 맞아 4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북5도위원회에서 봉오동·청산리 승전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에 있었으나 이날 함께 행사를 가졌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은 고향이 평안남도고, 100주년 행사를 준비해온 이들도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과 그 후손이다. 이명우 이북5도위원장(평안남도지사)은 "고향의 선대 어르신들은 암울한 일본 강점기와 해방 정국 이후 공산 정권에 맞서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며 "이념 차이로 조국이 나뉘어 고향 땅을 밟지 못하는 후세 실향민들의 모습에 비통해하실 것"이라고 했다.

4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북5도청 마당에서 열린 ‘이북도민 역사기록 사진전 및 남북이음 교육 순회강연 개막식’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작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로 일제에 대한 한국 독립운동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봉오동 전투가 개전 100주년을 맞았다. 오는 7일에는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봉오동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식’이 개최된다.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직후 만주에서 집결한 독립운동 세력이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벌여 사실상 첫 승리를 거뒀다는 의의가 있다. 당시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의병장 출신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은 두만강 국경을 넘어 국내 진공(進攻) 작전을 펼쳤고, 수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철수했다.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추격해 온 일본군을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대파했다.

독립군 세력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대규모 병력을 간도로 파견했고, 독립군은 허룽(和龍)현 이도구·삼도구의 삼림지대로 이동해 집결했다. 10월 20일 일본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김좌진은 고지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이들을 기다렸다. 21일부터 26일까지 계속된 10여 차례 전투에서 김좌진과 나중석·이범석·홍범도 등이 이끄는 독립군은 무장 독립운동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승리를 거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는 봉오동 전투에서 157명, 청산리 전투에서 1200여 명이었다.

장석흥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한국독립운동사)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는 민병(民兵)이었던 독립군이 일본의 정규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를 거둔 사건이었다"며 "이후 '우리도 일본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준 독립운동사의 기념비적 전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