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보이그룹 ‘MCND’가 영상통화로 팬 사인회를 열었다. 가수가 팬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하고 앨범에 사인해 택배로 부쳐준다.

매일 달고 사는 휴대전화지만, 어디 망가진 곳 없는지 괜히 한 번 더 살펴본다. 방구석 멀쩡한 와이파이도 오늘따라 안 터질까 걱정이다. LTE 인터넷을 빵빵히 연결한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절대 놓쳐선 안 될 전화가 올 예정이다. 휴대전화 카메라의 '셀카 모드'로 얼굴이 가장 잘 나오는 각도를 찾으며 기다렸다. 카카오톡으로 영상통화가 걸려 온다. "SUHO 수호: 페이스톡 해요."

"여보세요? 오빠, 저 보이세요? 목소리 들리면 하트 그려주세요." 내 휴대전화 화면에 가득 떠 있는 얼굴은 내 '최애(최고로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든다.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어젯밤 꿈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 K팝 아이돌 그룹 사이에서 유행하는 '영통 팬싸(일대일 영상통화로 진행하는 팬 사인회)'다.

강아지 자랑하고 케이크 불어주고

"음악 프로그램 1위 축하한다고 케이크 보여줬어요. 언니가 입으로 후 불어줬어요."

지난 2일 걸그룹 '마마무' 솔라의 팬은 영상통화를 위해 촛불 붙인 케이크를 준비했다. "지금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까, 가수가 팬들과 직접 만나지는 못하잖아요. 아쉬워서 '영통 팬싸'를 준비했어요." 마마무 소속사 RBW 관계자가 말했다.

방구석이 팬미팅 장소가 됐다. "아, 너무 귀여워요. 시간 다 됐는데 강아지 때문에 못 끊어요(웃음)." 지난달 11일 걸그룹 '(여자)아이들'의 팬은 멤버 슈화에게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자랑했다. 녹화된 팬 사인회 영상에서 강아지를 본 슈화가 환하게 웃었다. 보이그룹 '엑소' 수호의 팬은 가수가 갔던 미국 여행지를 다녀와 사진을 보여줬다는 후기를 공유했다.

'영통 팬싸'의 시작은 지난 3월 갓 데뷔한 보이 그룹 'MCND'. 코로나 사태에 앨범을 낸 다른 가수들 사이에서도 영상통화 팬 사인회가 이어졌다. RBW 관계자는 "오프라인 팬 사인회에서는 다른 팬들을 의식해 못 했을 말도 영통 팬싸에선 할 수 있다. 팬들이 가수와 하는 대화를 친구처럼 편안히 즐기는 것 같다"고 했다. '(여자)아이들' 소속사 큐브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둘만 아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영상을 소장하기도 쉬워 반응이 정말 좋다"고 했다.

이젠 신비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영통 팬싸는 앨범 구매자 중 약 50명을 뽑아 진행하는데, 앨범을 많이 살수록 당첨 확률이 높아진다. 아이돌 그룹에게 팬 사인회는 매우 중요한 상술이다. 앨범 1장을 살 때마다 팬 사인회 응모권이 생기기 때문에, 당첨을 위해 100장을 한꺼번에 구매하기도 한다. '가온차트'에 따르면 지난해 상위 400위까지 국내 앨범 판매량은 2460만장. 세계적으로 실물 앨범이 약세를 보이는 상황에서도 2016년(1080만장)의 2.3배로 증가했다.

팬 사인회는 충성도 높은 K팝 팬덤의 비결이기도 하다.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는 "K팝 팬덤은 다른 장르와 다르게 '정서적 몰입감'을 중요하게 여긴다"며 "요즘 아이돌에게 신비주의는 안 통한다. 무대 위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 중요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팬 사인회와 라이브 방송 등으로 팬들과 일상을 나누며 친밀감을 주는 게 지상 최대 목표"라고 했다. 김헌식 문화 평론가는 "옛날에는 아이돌을 우상으로 여겼다면, 지금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또래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콘서트와 달리 팬 사인회는 가수에게 선물을 주고 '스킨십'도 하며 접촉할 수 있다"고 했다.

19년 만에 활동을 재개한 가수 양준일은 안전한 '드라이브 스루'로 팬 사인회를 열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지난달 28일 경기 파주의 한 아웃렛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온 팬들에게 장갑을 낀 채 사인을 해줬다. 마스크를 착용한 팬들은 발열 체크와 손 소독을 거친 뒤 사인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코로나도 '덕질'은 못 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