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미국 매체 ESPN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역대 최악의 영입 TOP 50’을 발표했을 때, 국내에선 대체로 “EPL에서 2시즌 넘게 8분 출전이 전부”라는 이유로 48위에 이름을 올린 박주영(35·FC 서울) 정도만이 화제가 됐다.

하지만 사실 이 최악의 영입 순위에선, 2~50위를 전부 더해도 1위 단 한 명의 존재감을 뛰어넘기 어렵다. 2~50위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먹튀나 유리몸 소리를 들을지언정 이래저래 프로로 활동할만한 실력 자체는 갖췄지만, 1위에 랭크된 알리 디아(55)는 제대로 된 축구 선수조차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아기사슴 같았다."

◇나 조지 웨아인데

사건이 벌어진 때는 옛날 옛적, H.O.T가 전사의 후예를 부르고 마이클 조던이 아직 코트를 뛰고 이만수도 한창 현역으로 야구하던 1996년 11월 즈음이었다. 갓 사우샘프턴 지휘봉을 잡은 그레임 수네스(67)는 팀 리빌딩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사우샘프턴은 지난 1995~1996시즌을 20팀 중 17위로 끝내 강등을 간신히 면한 처지였다. 가장 큰 문제는 리그 38경기에서 34득점에 그친 공격진이었다. ‘사우샘프턴의 신’ 맷 르티시에(52) 하나만으로는 아무래도 화력이 부족했다.

이베이에서 판매 중인 '97년 프리미어리그 그레이엄 수네스 카드'.

그때 수네스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 상대는 자신을 ‘조지 웨아’라 소개했다. 그리고선 본인의 친척 중 파리 생제르맹(PSG)에서 뛰다 최근 자유계약(FA)으로 풀린, A매치 13경기에 출전해 5골을 넣은 라이베리아 국가대표 공격수가 있다며 영입을 고려해 달라 말했다. 그가 추천한 인물이 바로 알리 디아였다.

조지 웨아(54·라이베리아 대통령)는 1995년 아프리카인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한 공격수로, 아르센 벵거(71·前 아스널 감독) 생애 최고 아웃풋으로 꼽히는 축구계 거물이다. 수네스는 웨아와 사적인 친분이 없었다. 그러나 축구인으로서 웨아의 실력과 명성만큼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모국 라이베리아에서 대통령 당선까지 성공한 조지 웨아.

제안에 혹한 그는, 모든 절차와 테스트를 생략하고 2주도 채 지나기 전에 디아와 계약 도장을 찍는다. 다만 계약 기간은 1개월로 한정했다. FA로 풀린 디아를 일단 ‘잡은 물고기’로 확보해 두고, 실력을 파악하며 장기 계약 여부를 타진해 보겠다는 계산이었다. 수네스는 훗날 그의 자서전 ‘Football: My Life, My Passion’에서 디아를 회고하며 “선수와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가장 최소 단위 기간이 1개월이었다”고 적었다.

디아는 그렇게 사우샘프턴에 입단했다. 그리고 1996년 11월 23일, 리즈와의 경기 교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전반 32분쯤 사우샘프턴의 간판 공격수 르티시에가 상처를 입었다. 피치 바깥으로 물러서는 그를 대신해, 33번 유니폼을 걸친 ‘조지 웨아의 사촌’이 그라운드로 향했다.

출전하는 알리 디아.

◇아 망했어요

“얼음판에 선 새끼 사슴 같다. 보는 내가 부끄럽다.” - 맷 르티시에

얼음판에 오른 새끼 사슴은 대충 이런 모양새다.

그 어느 부분도 프로 선수의 몸짓이라 봐 줄 만한 구석이 없었다. 골문 앞에 늘어선 수비수들과 멀찍이 떨어져 경기장 우측 코너 쪽에 처박힌 것은 백번 양보해 탈압박이라 쳐주더라도, 기껏 날아온 공을 키핑하지도 못하고 발끝으로 상대 골키퍼에게 튕겨 주는 것은 도무지 공격수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퍼스트 터치라는 개념을 아예 모르는 듯했다. 디아를 향해 날아온 볼은 신체 어딘가에 부딪힌 뒤 탱탱볼처럼 튀어나갈 뿐이었다. 키핑이건 드리블이건 제대로 구사해 내는 기술이 없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병약소녀 수준으로 발도 느리고 몸싸움도 약했다. 그렇다 해서 드리블로는 의자조차 제치지 못하지만 골만큼은 어떻게든 집어넣는, 필리포 인자기(47) 스타일의 포처(Poacher)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의 동작을 패스나 슛이라 해석하기엔, 차낸 공의 궤적에 어떠한 목적도 철학도 보이지 않았다.

공격가담도 못 하는 공격수인지라 수비가담은 애초에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능력과 축구 센스 전부가 수준 미달이었다. 결국 그는 후반 40분에 켄 몬코우(56)와 교체돼 필드 바깥으로 쫓겨난다. 영국 매체 가디언은 “그날 사우샘프턴엔 스트라이커가 없었다. 경기 후 그 누구도 탈의실에서 입을 열지 않았다. 디아는 이틀 동안 자취를 감췄다”고 보도했다.

디아의 플레이를 중계방송으로 보다가 멘탈이 나간 사우샘프턴 팬들.

◇사실 나는 조지 웨아가 아니다

진실은 훗날에야 밝혀졌다. 수네스에게 전화를 건 이는 웨아가 아니었다. 그는 사실 디아의 친구로, 열정은 있음에도 재능이 모자란 가엾고 딱한 벗을 도우려 장난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디아는 1988년 프랑스 5부 리그 AS 보베에서 데뷔한 이래 6시즌 간 5~6부 리그를 떠돌았다. 이 시절 출전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1995년 핀란드 3부 리그 팀인 핀파에 입단해서야 그는 5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골은 기록하지 못했다. 그 해 같은 리그 내 팀인 반타로 이적했지만 3경기 출전해 1골을 넣는 데 그쳤다. 시즌이 끝나기 전 독일 4부 리그 소속 VfB 뤼베크로 옮겼으나 두 경기를 뛰며 한 골도 따내지 못했다. 이듬해 잉글랜드 6부 리그 블리스 스파르탄으로 옮겼지만, 그라운드에 설 기회는 단 한 번 주어졌을 뿐이었다.

확인 가능한 디아의 사우샘프턴 입단 전 공식 기록은, 아마추어 리그에 7시즌 동안 머물며 11경기 출전해 1골을 넣은 게 전부였다. 축구 경력이 웬만한 대한민국 육군 상병만도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선수 시절 내내 별볼일없었던 디아였지만, 친구의 장난이 대박을 친 덕에 EPL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지금도 EPL 선수 페이지에선 디아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EPL 알리 디아 선수 소개 페이지.

다만 당시를 기록한 영상과 르티시에가 은퇴 후 이 사건을 회상하며 말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디아가 경기에 앞서 팀 훈련에 참가했을 때 즈음부터 이미 수네스와 구단은 그의 실체에 대해 눈치를 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데다 공격 자원도 모자란 판국이라, 반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기적을 바라며 디아를 실전에 투입했던 듯하다.

아무튼 이런 허술한 사기는 PSG에 확인전화 한 통만 했어도 사전에 간단히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여권만 똑바로 봤더라도 일찌감치 걸러낼 수 있었다. 디아의 국적은 세네갈로, 라이베리아 A매치에 13경기나 출전할 이유도 방법도 없었다. 그러나 수네스는 일을 서두른답시고 이러한 기본적인 검증조차 모조리 무시했다. 그나마 계약을 초단기로 맺어 리스크를 줄여 뒀다지만, 그렇다 한들 어지간해선 어린애도 속지 않을 장난에 EPL 감독이라는 양반이 맥없이 당했다는 사실 자체는 딱히 달라질 것이 없었다. 결국 그는 온누리의 웃음벨로 전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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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에필로그

디아는 경기 2주 뒤 계약 기간 만료로 방출됐다. 재계약 협상은 물론 없었다. 그는 게이츠헤드나 스페니무어 등 영국 6부 리그 팀들을 맴돌다 2001년 뉴캐슬의 노섬브리아대에 진학해 경영학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2003년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로는 프랑스에서 낳은 그의 아들 우스만 사이먼 디아(28)가 태국 1부 리그 소속인 폴리스 테로에서 공격수로 활동한다는 것 외엔 별로 알려진 사실이 없다. 2016년 11월엔 가디언이 그를 다룬 기사를 내며 말미에 “저희는 디아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거기 있다면, 알리 디아씨, 우리에게 알려주세요”라고 적었다.

누군가가 정리한 알리 디아 스탯. 유명한 친척 '0', 팀 동료가 붙여준 '얼음 위 사슴' 브랜드 '5'.

선수 시절까지만 해도 수네스는 ‘붉은 제국의 척추’로 불리며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로 평가받았지만, 유니폼을 벗은 뒤로는 영 스마트한 모습을 보여 주질 못했다. 그는 디아 사건의 여파로 위엄과 권위를 깡그리 잃고서 한 시즌 만에 사우샘프턴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그 후로는 한동안 토리노, 벤피카, 블랙번 등의 사령탑을 전전했다.

뉴캐슬에서 잘리고서는 축구 분석가로 직업을 바꿨다. 그러나 2010 남아공월드컵 당시 RTE 스포츠 방송에서 세르비아 축구 대표팀을 주제로 말하던 중 “Vidic got raped… sorry, taken apart by Torres at Liverpool”이라 실언한 뒤로는 한동안 TV에도 얼굴을 비추는 일이 드물어졌다. 문장은 내용이 퍽이나 문란하고 사악한 관계로 번역을 생략한다.

위대했던 리버풀 선수 시절의 그레이엄 수네스. 그는 실로 축구밖에 모르는 바보(칭찬 아님)였다.

◇또 다른 사기극

EPL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아닌지라 이번에 ESPN이 선정한 ‘역대 최악의 영입 TOP 50’에 들진 못했지만, 수네스가 당한 것과 비슷한 이적 사기 사건은 축구판엔 몇 더 있었다. ‘자렐리 사건’도 그 중 하나다.

이탈리아 출신 청년 알레산드로 자렐리(1984~2018)는 2005년 10월 북아일랜드 1부 리그 팀인 리스번 디스틸레리에 이탈리아축구협회 간부인 마테오 콜로베이스의 추천장을 제시하며 입단을 요청했다. 추천장에 따르면 자렐리는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스코틀랜드 1부 리그)의 레인저스와 잉글랜드 풋볼 리그(EFL) 챔피언십에 속한 셰필드 웬즈데이에서 뛴 경력이 있었다. 영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왜인지 그는 실전에선 심각할 정도로 부진했고, 오래지 않아 팀에서 방출됐다. 자렐리는 이후 웨일스 프리미어리그 뱅고어 시티에 입단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리 오래 머물지 못했다. 다음으로 그가 모습을 보인 곳은 잉글랜드 9부 리그 팀인 드론필드타운이었다.

실력이 폭락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실력이 없었을 뿐이었다. 마테오 콜로베이스는 자렐리가 만들어낸 가짜 인물이었다. 추천장은 물론 그가 직접 제작한 작품이었다. 2006년 영국 방송 스카이 TV는 이 사기극을 폭로하는 다큐멘터리 ‘Super Fakes’를 방영했다. 자렐리는 TV 관계자와의 통화에서 “나를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시큰둥하게 감사를 표했다 한다.

알레산드로 자렐리.

브라질 출신 스트라이커 카를로스 카이저(57)가 벌인 사기극은 한층 더 스케일이 컸다. 그는 제법 훌륭한 육신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공 차는 실력은 수준 이하였다. 입단을 위한 메디컬 테스트는 쉽게 통과했지만, 실전에서 활약할 자신은 도통 없었다.

그가 택한 방법은 ‘꾀병’이었다. 체력 훈련엔 열성적으로 임하다 시합이 가까워지면 느닷없이 햄스트링 통증을 호소했다. 치아에 국소 감염이 발생했다 말하는 때도 있었다. 부득이하게 그라운드까지 끌려나온 날엔, 관중석에 뛰어들어 싸움을 벌이며 퇴장을 유도했다. 그 와중에도 구단의 눈이 닿는 곳에선 가짜 휴대전화를 사용해 다른 클럽과 협상을 벌이는 척하며 몸값을 조금씩 높였다. 그는 인간관계도 좋고 연기력도 탁월했다 한다. 카이저의 잔망스러운 쇼는 무려 13년간 이어졌다. 그는 1979년 멕시코 1부 리그 푸에블라에 입단해 1992년 브라질 과라니에서 은퇴할 때까지 한 경기도 뛰지 않았다.

2018년 4월, 그의 삶을 다룬 영화 ‘Kaiser: The Greatest Footballer Never to Play Football’이 개봉했다. 같은 해 8월엔 책으로도 발간이 됐다. 카이저는 언론 인터뷰에서 단 한 마디로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축구는 하고 싶지 않았다.”

카이저를 다룬 영화 포스터(왼쪽)와 그의 출전 기록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