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들어 코로나가 서방 주요국에선 둔화하고 있지만 러시아에선 갈수록 무서운 기세로 번지고 있다. 뒤늦게 코로나가 러시아를 강타하면서 20년째 장기 집권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위상도 흔들리고 있다.
5일(현지 시각) 러시아 보건 당국은 하루 사이 1만102명의 감염자가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사흘 연속 1만명대 환자가 쏟아졌다. 5일까지 러시아는 15만5370명이 감염돼 그중 1451명이 숨졌다. 3주 전인 4월 13일만 하더라도 감염자 1만8328명에 사망자 148명으로 유럽 주요국에 비해 피해가 적었지만 이후 폭발적인 속도로 바이러스가 번지고 있다.
코로나가 러시아를 집어삼키면서 '현대판 차르(옛 러시아 황제)'로 불리며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러온 푸틴이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있다. 그는 지난달 22일로 예정됐던 개헌 국민투표를 연기했다. 대통령 연임 제한을 없애 사실상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개헌안에 대해 국민 동의를 받을 예정이었지만 차질을 빚었다. 현행 헌법대로라면 푸틴은 2024년 물러나야 한다. 푸틴이 지난 1월 발탁한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는 코로나에 감염돼 치료받고 있고, 푸틴 자신도 모스크바 서쪽 외곽에서 사실상 격리 상태로 업무를 보고 있다.
푸틴이 9일로 예정됐던 2차 대전 전승기념일 행사를 무기한 연기한 것도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이 행사는 매년 세계 각국 정상을 초청해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이며 러시아의 힘을 과시하는 자리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올해 푸틴이 시진핑 중국 주석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초청해 좌우에 앉혀 놓고 위상을 뽐낼 예정이었지만 물거품이 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코로나로 심각한 불황을 겪을 것으로 전망되면서 푸틴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실망도 커질 것으로 서방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올해 러시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6%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 사태로 원유 수요가 감소하면서 유가(油價)가 급락하고 있어 러시아는 다른 서방국가들보다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러시아 정부는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로 재정 수입의 절반을 충당한다. 특히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직전 미국 셰일 업체를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가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원유 증산(增産)을 결정해 유가를 크게 떨어뜨린 것도 푸틴의 패착으로 지목된다.
여론은 심상치 않다. 민간 여론조사기관 레바다가 지난 3월 실시한 조사에서 푸틴의 지지율은 63%였다. 마땅한 정적(政敵)이 없는 푸틴에게 60%대 지지율은 상당히 낮은 것이다. 2014~2018년 같은 조사에서 푸틴은 꾸준히 80%대 이상을 기록했다. FT는 "코로나로 푸틴이 입은 타격은 올해 내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는 감염자 대비 사망자가 0.9%로 서방국가 중 최저 수준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사망자 숫자를 의도적으로 줄이는 통계 조작을 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 모스크바시가 밝힌 폐렴 환자만 7312명이다. 작년 2월과 비교해 53% 늘어난 수치이며, 상당수가 코로나와 관련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보건 당국이 이들을 코로나 감염자로 분류하지 않으려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부 도시 다게스탄에서 지난달 28일 한 의사가 "우리 병원에서만 최근 나흘 사이 12명이 폐렴으로 죽었고 거의 모두 코로나 환자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게스탄 보건 당국은 이날까지 누적 코로나 사망자가 11명이라고 밝혀 논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