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송기숙(전남대 명예교수)의 대표작 ‘녹두장군’(1989)은 ‘비결(祕訣)’ 편으로 시작한다. “선운사 도솔암에 마애미륵불이 하나 있다. 미륵불 배꼽에 비결이 하나 숨겨져 있는데, 누군가 그 비결을 꺼내려고 하면 대번 벼락을 맞아 죽는다. 한번은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그것을 꺼내려다 하마터면 죽을 뻔하였다. 그런데 1892년 동학 지도자 손화중이 젊은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가서 그 비결을 꺼냈다. 이후 소문만 무성해지고, 그 비결을 빼앗으려는 관리의 추격이 벌어진다.”
비결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소설은 그 내용을 밝히지 않은 채 암시만 할 뿐이다. 그런데 그 답을 청와대 동쪽 삼청동 총리공관(삼청로 95길)에서 찾을 수 있다. 정문 통과 후 공관으로 가려면 작은 능선이 가로막기에 그 능선 끝자락을 좌측으로 돌아 올라가야 한다. 능선 끝자락은 바위로 마감하고 있다. 북악산 중심맥이 경복궁으로 이어진다면, 그 옆 동쪽으로 작은 지맥 하나가 총리공관으로 이어진다. 그 지맥은 작은 언덕을 만들어 총리공관을 받쳐준다. 땅도 수미상관(首尾相關)이라야 혈(穴)을 맺는다. 북악산 정상 바위와 이 언덕 끝의 바위가 서로 호응한다.
언덕(총리공관 터)을 동쪽에서 받쳐주고 마감해주는 바위에는 초서(草書)로 쓰인 한자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간결하게 흘려 쓴 글씨체라서 읽어내기 어렵다. "정자(正字)로 바꾸면 '安得不寧'이다. 직역하면 '어찌 편하지 않음을 얻겠느냐!'이다. 일신상의 편함을 얻겠다는 뜻이 아니라, 위정자가 국민을 편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로 해석함이 마땅하다"는 뜻이다.(김기현 전북대 명예교수, 퇴계학)
누가 언제 왜 여기에 썼을까? 고증된 것은 없으니, 이 터의 내력에서 유추해나갈 수밖에 없다. 본디 태화궁(太和宮) 자리였다. 대한제국과 일제 때는 권력자들의 집터가 되었다. 해방 후 국회의장 공관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국무총리 공관이 되었다.
태화궁의 용도에 대해서는 고증된 바 없다. 주변 삼청동·소격동 등이 모두 소격전(昭格殿)에서 유래한 것을 감안하면 태화궁 역시 이와 관련됨이 분명하다. 태화궁이란 명칭은 도교 사원에 자주 쓰이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소격전은 하늘·땅·별에다 국가와 왕실의 '안녕(安寧)'을 기원하는 제사 담당 도교 관청이었다. 총리공관 언덕 끝 바위에 새겨진 '安得不寧'은 이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도교에서 제사를 지내던 땅과 물은 지극히 맑고 깨끗해야 했다.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로 쓰여 더 이상 그 물길을 볼 수 없지만, 1920년대까지 맑은 물이 돌바닥 위로 졸졸 흘러 곳곳에서 가느다란 폭포를 이루었다.(최열, '옛 그림으로 본 서울').
그렇게 맑고 깨끗한 길지에 세워진 공관을 수많은 총리가 거쳐 갔다. 강력한 대선 후보로 떠오른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김종필·이회창 전 총리는 대권을 감당할 수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행정의 달인 고건 전 총리 역시 대선 지지율 1위를 달렸지만 꿈을 접었다. 지난 4월 15일 밤 국무총리 출신 대선 후보 1인이 정치권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얼마 전까지 강력한 대선 후보 지지를 얻으면서 제1 야당을 이끌던 황교안 대표 말이다.
왜 총리 출신이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일까. 이번 ‘종로 대전(大戰)’에서 황교안 전 총리를 꺾은 이낙연 전 총리가 대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 과연 2년 후 대권을 잡을까? 답은 ‘비결’을 손에 쥐느냐 여부이다. 그 비결은 다름 아닌 ‘安得不寧’ 네 글자이다. 강산은 바뀌어도 백성(국민)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비결이다. 눈앞에 보고도 읽지 못하고, 읽어도 체화하고 실천하지 못한다면 비결도 헛된 일이다.